노숙자에게 가장 힘든 계절은 아마 겨울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여름은 어떨까? 여름에는 추위로 인한 고통은 없지만 더위도 만만치 않다. 그렇다면 봄, 가을은 어떨까? 겨울이나 여름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그래봤자 노숙자의 생활이 얼마나 다르겠는가? 노숙자들에게 몇 푼을 던져주는 게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건지를 놓고 설왕설래가 있다. 삶의 의욕을 상실한 이들에게는 돈 몇 푼 딸랑 던져준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란 것이다. 잔인한 얘기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한 푼이라도 벌려는 의욕을 가지게 해 주는 게 그들을 돕는 길이라고 한다.
이러한 노숙자는 지하철역 부근에만 있는 건 아니다. 성서에 나오는 예수와 그 제자들은 아마도 당시에는 노숙자는 아닐지언정 그보다 약간 나은 생활을 하던 이들이 아니었나 싶다. 왜냐하면 그들은 직업도 없었을 뿐 아니라 가진 재산을 도난 혹은 좀 먹을 위험이 있는 창고가 아닌 하늘나라에 쌓아두고자 했으며 누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 뺨까지 내놓는 무소유 내지 무욕의 삶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또한 세속적인 부귀영화는 멀리하며 존재에 대한 감사와 구원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렇듯 찬바람이 부는 때가 되면 노숙자 외에도 최전방 철책선을 지키는 군인이나 교통경찰 혹은 노점상과 같이 추위와 싸우는 이들이 생각난다. 이들은 법정스님의 에세이 제목처럼 '서있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성직자들은 왠지 그러한 범주에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들은 성서에 나오는 예수나 그 제자들과는 달리 기득권을 가지며 그것을 놓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러화나 유로화와 같은 기축통화와 대한민국의 원화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코로나 사태 이후 많은 국가들의 정부부채가 증가하거나 우리보다 더심각해도 별 말이 없지만 대한민국의 정부부채가 최근 GDP의 50%를 넘자 IMF는 위험하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IMF 사태 때 많은 회사가 부도나고 직원들이 직장을 잃고 가족들은 추위에 떨었다. 당시 돈이 많던 이들은 금리가 올라 오히려 재산을 늘릴 수 있었다. 지금도 날이 추워지면 추위에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이 있는 반면 스키를 타며 낭만을 만끽하는 이들도 있다.
이렇듯 같은 하늘 아래 양극단에 있는 이들이 함께 살지만 법적으로 그 격차를 줄이는 장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법이 아닌 '기회의 균등'이란 잣대를 대면 이를 정상적이라 볼 수만은 없다. 과거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인민이 주인이 되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원래의 취지와는 달리 현실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특히 생산성 저하로 인한 하향평준화로 몰락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추위로 뜨는 이들이 사라지거나 아니면 서로 온기라도 나누는 장치란 건 과연 존재할까?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를 제기하며 나온 '해방신학'은 인간을 사회의 구조적 악에서 해방시켜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며 선진자본주의에 종속되어 불이익을 강요당하는 후진국의 탈종속, 경제적 불평등 해소, 인종과 성별 사이에 있는 억압과 지배상태 해소를 부르짖었다. 하지만 부의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니 자본주의의 한계라고 할지 모르지만 무한경쟁이 펼쳐지는 세상에서 경쟁력을 가진 자만이 살아남고 또한 영화를 누린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니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는 세상이지만 이를 바로잡기 위한 대안이라면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는" 이들이 많이 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 필요한 건 참 교육이다. 명문대를 나와 고액 연봉자가 되어 자기 가족만 잘 살기보다 국가와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또한 언론을 활용해 사회 분위기를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신문 기사에도 특정인의 인적사항을 학력이나 연봉이나 재산 대신 사회를 위해 내어놓은 돈으로 바꾼다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