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환갑을 맞은 나는 오늘 문득 삶 속에서 성공의 의미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 개인의 삶을 놓고 성공했다고 하는 경우는 대개 좋은 환경 속에서 어느 분야에서 남들보다 뛰어났거나 혹은 역경을 이겨내고 자수성가해서 부와 명예를 차지하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거기에 자식들까지 부모의 자질과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성공한다면 혼담이 오갈 때 주변에서는 "집안 좋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호강한다고 해서 '성공'이고 그렇지 못하다고 '실패'라 단정할 수는 없는 게 인생이다. 현실적으로 성공을 했다는 이들 가운데는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지탄을 받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십 대 때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먼저 인간이 돼라"는 말을 하곤 했지만 당시에는 인간성이야 어떻든 명문대학에 진학하면 일류인간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류인간이 되었다. 행실이 모범적이고 타의 귀감이 되는 이라도 성적이 등수 안에 들지 않으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마찬가지로 인간성이야 어떻든 공부 하나 잘하면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이렇듯 학교에서 성적 이외의 가치는 죄다 무시당했다면 사회에서는 돈이나 사회적 지위 이외의 가치는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위인들을 보면 세상의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공자와 예수와 같은 인물은 '부'나 '사회적 지위'와 같은 세속적인 욕심은 안중에도 없었다. 특히 예수는 사랑과 용서를 외치다 죄도 없이 대역죄인으로 몰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후 이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권력이나 부에 목숨을 걸다 허무하게 사라진 인물들과는 달리 그는 위대한 인물로 남아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도 그러한 인물이 하나 있다. 맨몸으로 아프리카 남수단의 톤즈에 가서 전쟁의 공포와 질병으로 신음하던 이들을 상대로 한센병을 치유했던 이태석(1962~2010) 신부가 바로 그다. 그는 의대를 졸업한 후 개업해 부자가 되려는 이들과는 달리 고독한 성직자의 길을 택하였다. 또한 그는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죽을 고생을 사서 하며 지내다 대장암에 걸려 48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일찍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희생과 봉사의 삶에 대한 스토리는 영화로까지 제작되어 누구나 알고 있지만 내가 최근 들어 '우리는 이태석입니다'라는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그는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자기를 대신해서 환자를 돌볼 '제2의 이태석'을 양성하였다. 그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학교를 짓고 직접 청년들을 가르치며 그들을 의과대학에 입학시킴으로써 자신이 해오던 일이 끊어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 비록 죽어서 육체는 썩어 땅에 묻힐지언정 이태석은 부활했다는 말을 해야 할 것이다.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출세해서 호강하며 사는 걸 보고 흔히 "성공했다"라고 말한다. 성공을 해야 하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성공 내지 행복이란 건 자신이 사는 동안 잠시 향유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이다. 더불어 누릴 수 있다면 그나마 값질 수 있지만 혼자서만 향유할 뿐 아니라 자기 하나 빛나기 위해 희생된 이들도 알게 모르게 많은 것이다.
성서를 보면 예수님은 피 흘리며 죽고 난 후 사흘 만에 부활했다고 나온다.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누구나 사망과 동시에 육체는 형체도 없이 사라지며 존재 자체가 소멸한다. 하지만 이태석의 경우는 자신이 교육시켜 의사가 되게 한 제자들을 통해 자신이 하고자 했던 사랑의 실천을 부활시킨 사람이다. 인간은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마냥 한평생 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허무한 존재이기에 인간의 삶 자체도 허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삶의 허무함을 떨쳐버리려면 최소한 그 생명력을 사망 이후까지 지속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고인이 된 이태석은 사망한 후에도 자신의 제자들을 통해 이를 가능케 하였다. 그는 비록 죽었지만 우리 곁에서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