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라는 무기로 알을 깨고 나간다
인지와 정서와 행동 중에
인지가 대가리다,하고 가르쳤던 김덕희교수님덕에
내가 내 상태를 인지하는 것을 배웠다.
그러고나니 김경일교수님의 유튜브가 들어왔던건
우연이 아닌 운명이라고 믿고 싶을만큼
엄청난 깨달음의 연속이다.
내 가정환경이 부모밑에 자랄 수 없다는 걸 안 건 11살 정도.
좋아하는 음악을 나는 할 수 없겠구나 깨달은 건
아빠의 다단계 빚을 갚아야 해서 팔려가는 피아노를 붙잡고 펑펑 울었던 13살에.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걸 제대로 직시한 건 17살.
엄마에게 생활비부치고 나면 잔액이 없어서 700원 삼각김밥을 먹어야 하니 거지랑 내가 다를 바 없구나 느낀 건 20살.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여긴 건 21살.
내 딩크선언은 어쩌면 나를 해부하고 나온 결론이
내가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기보다 나의 어린시절을 보상받기 위한 도구로 여기며 바라지도 않은 헌신을 하고 내 욕심대로 키워질 아이가 너무 불쌍해서 인듯 하다. 진짜 내가 그럴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불안이 평생 가는 것 같다.
9명 식구가 사는 집에서 할머니랑 7살부터 19살까지 같은 방을 썼다.
외갓집에 놀러가면 8명 이모삼촌들 동생들을 삼촌집 안방에서 혼자 데리고 놀아야하는 건
거실에 모처럼 모인 엄마와 이모삼촌을 기쁘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 (그런 게 인정욕구였을까.)
스무살에 막내외삼촌집에 얹혀살 때에도
월세를 내지않으니
집안일과 숙모의 심부름. 첫애를 돌봐주는 일 정도는 당연히 오후 6시면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주말에 아르바이트.
그리고 대학등록금 벌어야하니 휴학.
이때까지 내 삶은 그냥 버티는 삶이 맞았던 것 같다.
복학해서 들어간 회사에 부푼 꿈을 안도 50만원 적금을 들던 2009년.
8개월된 적금을 아빠의 전화로 깼다.
음주운전 벌금을 내주지 말걸.
(지금 나였다면 감옥에 가는 게 사회를 돕는거라며 아빠가 날 죽이러 와도 징역살이를 하게 두었을거다.)
그때는 한번이면 아빠가 정신차리고 바르게 살거라 생각한 것 같다.
이후 2014년. 아빠의 도박빚에 돈가져오라는 폭력을 견디다못해 엄마는 딸몰래 사채를 쓴 나머지 내 월급과 큰엄마가 해주신 전세보증금까지 압류되고 난 뒤에는
퇴사한 퇴직금과 은행대출로 그 빚을 채권자 달러이자떼던 아줌마를 찾아가 해결하고 왔다.
이 때 나는 엄마 아빠는 더이상 내 부모로서의 역할을 영원히 못할거라 깨달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 엄마와 아빠를 감사한 부모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았는지에 대한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
자식이 부모를 객관적으로 보는 시점은
아마 경제적이든 정신적으로든 부모에게서 완전히 독립해서인 듯 하다.
그리고 다른 부모들과의 생활권에서 자란 친구들을 보며 내 가족의 문화를 깨닫는 것 같다.
우리가족이 정상범주에 들지 않는구나.
인정하기까지 오래 걸린 듯 했고.
나 역시 구김살없고 밝다 씩씩하다 이면에
부정적자아와 열등감 자격지심으로 꽉 찬 뇌가
정상적이지 않은 호르몬을 만들어냈던 것도 분명하고.
결혼하고 남편과의 다툼속에서 날 더 알게 되었고
취업준비 후 남편과 동생의 게임중독으로 개인상담중 발견한 심리기제까지 확인하고 나니까
나도 꽤 아픈 상태를 부정하고 살았구나 싶다.
나 정상이야
하면서.. 멍청한 생각.
무언갈 해야 인정받고 사랑받을거야 하는 마음이
적당히 있는 건 좋지만
매 순간 그런 사람을 보는 건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도 안쓰러운 일이었나보다.
나는 대학1학년때부터 25살까지 너무 많이 그런 말을 들었다.
"너무 열심히 사는 거 아니야?적당히 놀고 해야 대학청춘이지."
"인생 너무 재미없게 사는 것 같은데."
"너무 부모님한테 자주 돈보내는 거 아니야?"
"그냥 싱가폴 주재원 가는 게 어때?여기 생활에서 벗어나보면...."
"니가 안가는 거지 너는 얼마든지 유학을 선택할 수 있어."
"집에 일찍 오지말고 이걸로 영화도 보고 좀 놀아 다른 애들처럼. 남친도 좀 만들고."
"너가 아무것도 언니들한테 해주지않아도 언니는 너를 너무 좋아해. 사랑해. 그러니 압박감에 뭘 하려고 안하면 좋겠어."
위에 말해준 사람들은 전부 대학선배. 막내외삼촌. 스위스에서 패러글라이딩한다고 4인실 게하에서 만나 15년째 나를 사랑해주는 언니들.
"너 거기 가면 할머니 잘못되면 아빤 못일어나."
이건 싱가폴 해외주재원 가고싶다고 했다가 아빠한테 들은 말.
지금 생각해보면
제일 나를 걱정한 줄 알았던 아빠는
나를 주저앉게 만들고 자신의 빚을 갚아줄 도구로 차근차근 이용중이었는데
이미 엄마와 오빠가 그 늪에 빠져 신불자가 되었는데
밑빠진 독 물붓기 라는걸 너무 늦게 알았다.
어쩌면 그렇게 나를 한국에서 외국으로 보내고 싶어했던 8살 연상의 전전 남친이 진짜
아빠보다 나를 더 생각해준 사람이 아니었나.
피붙이보다 나를 더 잘되길 바라고 응원하는 타인이
존재하는구나.
라는걸 결혼을 하고 알다니.
빠가야로중의 상빠가 되시겠다.
학고먹으면서까지 강행한 25살 유럽여행이 아니었다면 정말 지금의 내가 없었을지도.
주변에 영향을 안받을 수 없다는 걸 안다면
꼭 긍정적인 문제해결의 T가
F주위엔 필요하다.
처음엔 남편이 극 ISTP라 공감을 못하네 어쩌네 해도
지금의 나는 그 쌉T들 덕분에
조금은 차분해지고
조금은 그래서 어떻게??가 되어가고있는 것 같다.
나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자기연민보다
나를 더 아깝게 여기고 대접받아 마땅한 존재로 여겨줄 줄 아는 자기애가
인생 사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도.
모든 감정과 사고는
우리가 살아온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고 느끼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너무 뜨끈하게 잘 알게 된 것 같다.
일요일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의 간단 주먹밥을 데워서 보온통에 담아 건네며 출근시키고는
급체로 오타이산을 먹고 침대에 나뒹구는 이 아침도
다 지나가리라는 것도.
지금을 사는 것이
모든 것의 최선이라는 것 역시도
인생이 왜 속도보다 방향인지도.
머릿속에 꽂아진 마음 속 깃발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나아갈 앞으로의 시간들도
기대되기 시작한다.
내 머릿 속의 인지된 행복을 놓치지 않으려는
나의 모든 몸부림.
그걸로 한계를 넘기 위해 알을 한겹씩 깨나가기 위해,
아주 시궁창에 처박아두려던 인생을
끝까지 달려보고싶게 만드는 좋은 인연에
보답하며 살기 위해,
오늘도
기록을 남긴다.
신념을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