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약간의 성대모사 잘하는 법
나 같은 범인(凡人)들과 개그맨의 가장 다른 점 중 하나는 '관찰력'이다. 특히 성대모사나 얼굴모사와 같이 누군가를 흉내 내거나 어떤 상황을 재연할 때 그들의 관찰력은 남다른 빛을 발한다.
원로 배우 특유의 느릿한 말투와 말의 쉼을 정확하게(?) 흉내 내거나, 가수 임재범 씨의 거친 목소리와 불안한 눈빛을 분장 없이 보여주는 등의 코미디 영상을 볼 때마다 배꼽을 잡으면서 동시에 경외심마저 든다. 나중에 아무리 따라 하려고 해도 비슷하기는커녕 썰렁한 눈초리만 받게 된다.
개그맨만큼의 관찰력이 내겐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자유자재로 굽어지는 목소리나 유연한 얼굴 근육보다도, '관찰력'이 유명인 흉내내기를 잘하기 위해 더 유리한 능력인 이유는 몇 가지 있다. 먼저 유명인 이름을 밝히고 가는 전략이 아니라면, 남들이 내 성대모사를 보고 '바로 그 유명인'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먼저인데 그 모사에 필요한 요소들은 사실 몇 가지 되지 않는다.
학창 시절에 그나마 기본은 했었던 나의 성대모사 개인기는 '김대중 전 대통령' 음성 모사였다. 중요한 포인트는 특유의 얇은 쇳소리 섞인 목소리를 내야 하는 점, 말 서두에 '에~' 하는 추임새를 반드시 넣어야 한다는 점, '~입니다' 류의 어미에서 살짝 '입니댜'와 같은 느낌으로 발음해야 하는 점 등이다. 숙련도가 높은 사람은 특유의 눈빛을 추가로 흉내 내며 개인기에 활기를 더하기도 한다.
이건 사실 너무 유명한 개인기라 숙련 방법과 포인트가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학교 선생님이나 직장 상사, 미운 동료나 뜨고 있는 연예인의 흉내내기를 즉석에서 시전 하고자 한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 성대모사의 포인트 마냥 적절한 요소를 빠르게 추출하는 능력이 필수적인데, 이건 앞서 말했던 높은 '관찰력'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좋은 관찰력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도 하지 않은 흉내내기의 영역을 선점할 수 있다. 선구자에게는 그리 높은 기준이 적용되지 않으니 실력을 너그럽게 인정받을 수도 있다. 좋은 관찰력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확연하게 다른 그 사람만의 습관, 자주 쓰는 추임새나 말 습관, 약간의 틱(?)이랄까, 찡긋 대는 얼굴의 움직임이나 찰나의 그 무언가!이다. 그 사람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포인트는 아니지만, 그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일종의 '특이점'을 찾아내는 과정은 성대모사로 '인싸' 등극을 위한 필수적인 것이다. 난 최소한 그렇게 믿는다.
설명하면 할수록 썰렁한 성대모사 개론을 펼쳐 놓은 이유는, 약간의 자부심이 있는 내 성대모사 숙련도를 한번 정비하고자 하는 취지도 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오랫동안 망상 속에서만 즐겨왔던 일종의 (모든 것들의) '장르론'을 꺼내어 얘기해보고자 함이다.
시나 소설은 문학의 장르다. 힙합이나 트로트는 음악의 장르고, 육성 시뮬레이션이나 RTS, MOBA 등은 게임의 장르이다. 장르는 어쨌든 이미 창작된 결과물을 후에 적절하게 설명하고 분류하기 위한 도구다. 하지만 (어떤 영역의 창작물이 되었든 간에) 실제로 기획과 제작의 단계에서 이 장르는 그 자체로 매뉴얼, 혹은 지침서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특히 요사이처럼 대중 예술과 대중 창작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때에, 이미 관습화 되어 정의된 장르의 요소들을 역으로 차용하면 그 장르 '처럼' 보이는 뭔가를 쉽게 만들어 낼 수 있기에, 머리 아픈 문하생 생활과 창작 기법 수학은 바이 바이. 달달한 꿀만 쪽쪽 빨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누군가 본인이 아이폰으로 촬영한 영상을 가지고 와서 '공포 영화'같이 만들어 달라고 했다면, 당장 몇 가지 방법들을 바로 떠올릴 수 있다. 일단 하늘이 너무 푸른색이라면 우중충한 잿빛으로 만들고 안개나 먼지를 CG로 넣을 것이다. 그리고 구글에서 'Horror Ambient BGM sound'와 같은 검색어를 통해서 을씨년스러운 배경음악을 깔아 넣고, 어린이의 얼굴에 <엑소시스트>에 나오는 퀭한 눈과 토하는 입을 합성할 것이다. 불안한 음악이 깔리면서 불빛이 점멸되는 듯한 영상 효과 후에 비명소리를 후시로 삽입하고, 놀라는 주인공의 얼굴 커트를 붙이면 그럴듯한 인디펜던트 공포영화 같다. '그럴듯하다.' 이게 포인트다.
예시를 드는 것이 재미있으니 하나만 더 적어보려 한다. 유재석 씨의 부캐 '유산슬'로 트로트 가수가 되기 위해서 차용한 '트로트' 장르의 특징을 한번 떠올려본다. 뮤직비디오 <사랑의 재개발>을 보면 일단 반짝이는 겉옷과 짙은 선글라스, 언발란스한 모자를 쓴 유산슬 씨가 먼저 등장한다. TPO에 맞지 않는 촌스러운 의상(?)은 고속도로 휴게소 무대나 성인 취향의 유흥업소 무대, 그리고 몇몇 영화를 통해 노출된 80년대~90년대의 복고 패션으로부터 추출해 낸 '트로트'의 특징이라고 보인다. 미적 감각이란 전혀 없어 보이는 OAP와 CG들도 한 몫한다. 성인 취향 음악 방송에서 봤을 법한 섹시한 댄서들의 춤사위와 강렬한 제목과 가사의 통속성은 '트로트'를 완성시킨다. 작사/작곡은 조영수 작곡가와 김이나 작사가. 노련함으로 완벽한 트로트 곡을 탄생시켰다. '모든 요소가 완벽하다.' 이게 포인트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이폰 영상을 짜깁기해 만든 '공포 영화'처럼 보이는 저 무엇과 유재석 씨의 부캐 '유산슬'은 진짜 그 장르의 작품이 된 것일까? 쉽게 그렇지 않다고 얘기할 수 있다. 전자는 '공포 영화' 톤의 흉내내기 클립일 뿐이며 우리나라 공포 영화 계보 속에 안착하기는 어렵다. 유산슬도 물론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트로트가 대중적으로 사랑받게 되는 데 기여하긴 했지만, 누군가 국내 트로트 역사를 정리할 때 유산슬 씨를 당대 최고의 트로트 가수로 포함시키기는 다소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내가 김대중 전 대통령 성대모사를 아무리 잘한다 해도 나를 노련한 정치인으로 여기는 사람이 없듯이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것들이 진짜 그 장르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공유한다. 이것들은 '그 장르를 잘 흉내 낸 것'이다.
앞서 들었던 '아이폰 공포 영화 클립'과 '유산슬'과는 달리 특이한 사례들이 또 있다. 힙합을 패션으로 여기고 겉멋(?)든 힙합 애호가/뮤지션을 '힙찔이(힙합 찌질이?)'라고 부른다. 외국에서는 Wack MC 같은 표현을 썼던 것 같다. Fake rapper 같은 말도 생각나고 말이다. H.O.T의 멤버였던 문희준 씨는 록 음악 앨범을 발표하면서 정말 치욕적인 수많은 비난에 휩싸였었다. 진정성 부족한 가짜 록커라는 것이 이유였다. '오픈월드 RPG'라는 게임 장르로 홍보했다가 엄청난 논란과 비판, 환불과 불매운동을 불러왔던 게임 <사이버펑크 2077>도 마찬가지의 입장일 것이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해당 장르가 요구하는 물리적인 요소들을 좋은 관찰력을 통해 찾아내 충족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진짜 그것이 아니다'는 이유로 심하게 까였던 것들이라는 점이다. 이것들은 '진정한 그 장르가 아닌 것'이다.
예술, 유사 예술, 대중예술을 제작하고 수용하는 주체들 사이에서 진/가 논쟁, 진짜 그 장르, 흉내 낸 장르, 진정성의 유무, 충실하게 재현, 뭔가 부족함 등 이런 것에 대한 토론과 논의, 또는 말싸움이 끊임없이 가능한 이유는 앞에서 든 다양한 사례들이 현실에 넓은 스펙트럼으로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 말싸움 한가운데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 또 스스로 답을 생각해보는 건 정말 액티브하고 흥미로운 일이다.
Q. '그 장르를 잘 흉내 낸 것'을 만들려면 어떤 요소들을 관찰하고 찾아서 모사해야 할까?
Q. '그 장르를 잘 흉내 낸 것'을 교묘하게 속여서 '진정한 그 장르'로 만들어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Q. '진정한 그 장르가 아닌 것'이 '진정한 그 장르'의 지위를 획득하려면 뭐가 필요할까?
Q. 물리적 요소 말고 '진정성', '정신', '그간의 노력', '개인적인 사연' 등의 정성적 요소가 '장르'에 가지는 의미는?
이런 나 스스로의 질문에 대한 해답은 옹고집전과 같은 고전에 대한 연구들과, 대학 초년생 때 줄곧 읽던 문학 장르론, 내가 아직 접하지 못한 수려한 해외발 장르 이론, 그리고 요즘 누구나 하나 둘 쯤은 있다는 '부캐'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들을 참고해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시간이 걸릴 일이다.
방송 영상업을 줄곧 해온 나는, 직업 특성상 다양한 영역에 걸쳐 관심사를 두고 있다. 앞서 늘어놓은 이 편협한 장르론은 나의 여러 관심사들을 관통하는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주제다. 원본과 복제품, 가품과 진품의 경계가 무너진 지금 세상에서 꺼내보기에 그리 늦지 않은 얘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