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움에 대하여
▮ 종교와 수사(rethoric)
종교는 무엇일까? 누구는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 했고, 누구는 신의 계시를 왜곡시키는 인간적 욕망의 발로라 했으며, 누군가는 종교는 신의 계시의 매개라 했다. 무엇이 됐든, 종교는 결국 인간하기 나름이다. 인간이 종교를 또 다른 정치적 권력 수단으로 삼는 순간 그것은 민중의 아편으로 전락하며, 종교라는 이름으로 신을 절대적 명제로 규정하는 순간 종교는 지극히 세속적인 욕망의 산물이 되지만, 종교의 불확실성과 가능성의 경계를 의식하는 이에게 종교는 신의 계시를 위한 매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의 타락은 바로 종교적이라 자부하는 신자들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종교는 본성적으로 수사(rethoric)를 만들어낸다. 종교는 시간을 거치면서 불가피하게 교리를 형성하며, 교리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종교적이고도 관습적인 언어적 수사로 탈바꿈한다. 이 수사는 이제 성직자뿐 아니라 종교인들이라면 모두에게 통용되는 일종의 제2의 언어와도 같다. 물론 신앙 공동체 바깥의 입장에서 보면, 낯선 언어이며 따라서 그 공동체는 이종(異種) 세계로 여겨지지만 말이다.
▮ 성스러움에 대한 시선
우리는 영화 『바베트의 만찬』을 통해서 무엇이 성스러운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뚜렷한 답을 내리진 못한다 하더라도, 분명한 사실 하나는 발견한다. 성스러움의 의미와 표현 자체가 신앙 공동체에서 레토릭 차원으로 축소 환원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종교의 타락은 곧 성스러움의 탈각이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은 언뜻 보기에 기독교적 영화이다. 목사와 두 딸과 목사관과 목사관이 있는 마을이 이 영화의 전체 배경이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중심에 목사관이 있으며, 마을 사람들이 행하는 종교적 의식은 매우 일상적이지만 여전히 엄숙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이 목사관에서 행해지고 있는 종교적 의식들은 성스러운가? 성스럽다는 것(거룩)은 무엇을 말하는가? 영화는 바로 이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목사와 두 딸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과 마을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종교적 의식이 성스럽다고 말하기 곤란한 이유를 영화는 바베트라는 이방 여인의 행위로부터 넌지시 알려준다. 그리고 성스러운 것은 종교적 수사 안에 갇혀 있지 않으며, 도리어 속되다 여긴 것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해준다.
물론 성스럽다는 것은 신적인(divine) 차원을 인간의 사고 수준에서 언어적으로 표현한 단어이다. 따라서 거룩이 속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타당하지 않을 수 있다. 신적인 것은 오로지 신의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되다 여긴 것 안에 성스러움이 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분명한 것은 성(聖, sacred)과 속(俗, profane)을 날카롭게 대비시키거나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걸 이 영화는 암시적이지만 강력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그 반대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신앙 공동체의 레토릭이었다.
▮ 종교적 엄숙주의의 허실
목사관의 풍경은 고요하다. 시간에 맞춰 사람들은 예배하고 말씀을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며, 또 소박한 식사를 한다. 목사가 죽고 두 딸이 그 역할을 이어받은 후에도 그 광경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목사관의 풍경과 인간 내면의 상태는 달랐다. 그들은 함께 찬양하고 예배를 하는 공동체에 속하여 있었지만, 서로에 대한 서운함과 배신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동안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누군가 속내를 드러낸 순간부터 ‘성스러워야 할’ 목사관의 풍경은 삽시간에 ‘속된 것’이 되어 버린다. 목사의 딸들은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성경 구절을 말해보고, 함께 찬양하면서 어수선한 상황을 바꿔보려하지만, 역부족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목사관의 종교적 분위기를 지탱해온 것은 사실 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적 엄숙주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누군가 체면의 가면을 던지는 순간 엄숙주의에 토대를 둔 종교적 분위기는 그 허실을 금방 드러내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성스러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 일만 프랑을 모두 쏟아버린 여인 바베트
그렇다면 무엇이 성스러운 것인가? 우리는 프랑스로부터 쫓겨 들어온 바베트라는 여인에게서 성스러움의 차원을 발견한다. 이 여인은 지금으로 치면 난민이다. 바베트는 돌봄을 받아야 하고, 목사관의 예식을 따라야 하는 수동성을 갖춰야 마땅한 것 같다. 그녀는 이제 이곳에 왔으니 새로운 성의(聖衣)를 입어야 한다.
하지만 이 공동체에 가장 나중에 들어온 바베트는 가장 먼저 발견했다.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종교적 엄숙주의를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 금이 가고 있음을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을 비난하거나 조소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전 재산 일만 프랑을 모두 쏟아 부어 그들을 위해 만찬을 준비한다.
바베트의 만찬은 그렇게 차려졌다. 목사관에 어울리지 않을 융숭한 만찬. 듣도 보도 못한 음식들이 들어오는 광경은 종교적 외피의 경계를 조금씩 허물었다. 그들은 느꼈다. 혀의 감각을 맛의 향연을 말이다. 그리고 음식에 대해서는 침묵하기로 다짐했던 그들의 약속을 누군가 깨트리자, 종교적 수사가 아닌 정직한 언어들이 하나씩 식탁을 채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화해하며 서로 손을 잡으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 몸과 성스러움
무엇이 영적이고 성스러운 것인가? 바베트는 보여 주었다. 성스러움과 육체는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단걸 말이다. 영적이고 성스러운 것을 육체와 대비되는 것으로 가르치고 말해왔던 모든 수사가 얼마나 공허하고 피상적인지 우리는 이 영화로부터 배운다. 프랑스식 만찬과 같은 화려한 음식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이 곧 영혼을 지키는 것이라 하던 그 레토릭은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오병이어의 사건과 이방인 전도를 착수하던 베드로가 당면한 음식 규례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음식을 먹으며 함께 즐거워함이 곧 복이라 설파했던 전도서의 기록들을 익히 듣고 말하고 있는 우리는 이상하게도 성스러움에 대한 종교적 수사 안에 여전히 갇혀 있으며, 종교적 엄숙주의가 거룩의 표지인 것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그만큼 거룩은 우리로부터 멀리 있는 신적인 것이다. 하지만 바베트의 만찬 이후로 목사관의 풍경은 더욱 새로워지지 않았을까 싶다. 신적인 것에 그들은 보다 정직한 것으로 다가가지 않았을까? 바로 몸으로 말이다. 종교적 레토릭은 어쩌면 우리의 찢겨진 몸을 가려주는 외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엔 성스러움이 없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은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몸으로 오셨다는 걸 가리키지 않을까? 그래야만 사랑이란 것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란 생각을 해본다. 성스러움은 거기서 비로소 발견된다. 바베트가 그의 몸으로 만찬을 준비한 것처럼, 그리고 식사를 끝낸 후 혼자 주방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 그 순간처럼 말이다. 신은 바로 그 몸들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