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떠났다
나의 이민 이야기
서른한 살, 세 살 아이 하나를 데리고 갑작스레 과부가 되었을 때—나는 정말 죽고만 싶었다.
그런 나를 살린 건, 아이였다.
말간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밥이라도 억지로 밀어 넣으며 살아야 했다.
나는 한국 사회가 싫어졌다.
정확한 이유도 알 수 없던 아이 아빠의 자살은, 나를 한국이라는 사회 자체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5년간의 결혼 생활은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직 IT 업계의 버블이 터지기 이전, 주목받는 IT 회사에서 근무하던 시절, 사내 동료로 그를 만났다.
회사 내에선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누구의 부탁도 거절하지 못하는 그는, 남편으로서 최악이었다.
술을 마시고 주사를 부리거나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늘 집에 없었다.
업무 특성상 늦게 시작해 늦게 끝나는 일정도 많았지만, 본인에게도 직장과 그 직장에서 인정받는 일이 가정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는 거 같았다.
가정에 소홀한 이유가 돈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월급이 얼마인지도 모를 때가 종종 있을 정도였다.
그저 '사회가 기대하는 엘리트사원과 부모가 기대하는 착한 아들 역할'에 가정보다 우선순위를 두었을 뿐이다.
그렇게 아버지 세대의 가치관을 가진 신랑과 신세대의 사고방식을 가진 신부는 신혼 때부터 삐그덕 거렸다.
나는 항상 외로웠다.
늘 기다려야 했고, 주말이면 시댁에 가거나 시댁에 가지 않는 날엔 그는 주중에 부족한 잠을 잤다.
기대했던 결혼 생활은 애초에 없었고, 우리는 그 문제로 여러 번 다투었다.
나는 힘들다고 여러 번 표현했고, 그는 늘 "알았어, 미안해. 안 그럴게"라고 말했다.
하지만 '안 그러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 우리는 더 바빠졌고, 마음의 거리도 점점 멀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유서 한 장 없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깊은 죄책감에 빠졌고, 그 심연 속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견뎌야 했다.
개인에게 주어진 손바닥만 한 자유, 그리고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 짊어져야 했던 집채만 한 사회의 시선, 가족의 기대, 그리고 책임감.
나는 그런 한국 사회가 미치도록 싫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약 백 일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작은 가방 하나에 아이 옷과 장난감을 챙겨 한국을 떠났다.
그렇게 호주에 왔다. 나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이민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갑작스럽게 떠났기에 비자나 체류 계획 같은 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출국 전에 상담했던 이민 상담소에서는 사업 비자 신청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6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6개월을 기다릴 인내심도, 뭔가를 준비할 치밀함도 잃어버린 상태였다.
결국 관광 비자를 들고 시드니에 입국했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을 잤다.
해가 뜨면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간을 살아냈다.
관광비자 만료인 3개월이 지나기 전,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학생 비자를 신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딸린 나에게는 학생이 되어 학업을 하는 게 사업 비자받고 사업체를 운영하는 거보다는 현실적으로 용이하다고 생각했다.
영어학교 6개월을 등록했고, 학생 비자를 신청했다.
그러나 결과는 비자 거절.
한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영어 선생으로 일했던 내가 호주에서 영어학교에 간다는 것이 '진정한 학생'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유학원에선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비자를 받아오라고 했다.
이민 대행사는 "아이를 데리고 온 나이 많은 학생은 호주 정부에서도 반기지 않는다"며, 현실적인 해결책으로 '제대로 된 전공을 가진 학교 진학'을 권했다.
그들은 간호나 회계를 추천했다.
학생 비자뿐 아니라 영주권 취득에도 유리하다고 했다.
나는 사람에 치이는 걸 힘들어했기에 간호보다는 회계가 맞을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난 수학과 논리에 강하다는 내 생각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이민성의 신뢰를 얻기 위해 학교는 UNSW로 정했다.
그렇게 만 서른둘의 나이에 나는 호주에서 대학생이 되었다.
열여섯에서 스무 살 사이의 학생들과 함께 강의실에 앉아 공부를 시작했다.
호주 대학 특유의 그룹워크와 프레젠테이션 문화는 내겐 매번 벅차고 괴로웠다.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스피킹은 늘 약했고, 아이 픽업 때문에 그룹워크 참여도 어려웠다.
프레젠테이션이 있는 날엔 내 이름이 불릴까 봐 가슴이 쿵쾅거렸고, 시계만 바라보며 어서 끝이 나길 기다렸다.
하지만, 타고난 영리함 덕분이었을까. 결국 나는 졸업했고,
길고 긴 회계사 심사를 거쳐 마침내 영주권을 받았다.
호주에 온 지 4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