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미국 생활 도전기

말이안되면 보디랭귀지로...노력하면 어떻게든 통한다.

by 이글파파

MBA 합격으로 온 가족에게 낯선 미국 버지니아에서 생활하는 모든 것이 도전이다.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눈으로만 공부한 필자는... 문법은 젬병이다. 지금도 약간(?) 그런 입장이긴 한데, 영어는 소통을 위한 도구이지 내가 굳이 그 나라의 소설이나 시와 같은 유명 작품을 모두 이해할 수준까지의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나, 미국의 대학원에 진학하려면 그 "도구의 수준"이 좀 많이 높다. 예를 들어 대학원 기본 소양 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GRE(Graduate Record Examination)에서 일정 수준 이상으로 점수를 받아내거나, 경영학 석사 MBA를 진학할 경우 GMAT(Graduate Management Administration Test) 시험을 보고 각 학교에서 요구하는 기준점 이상을 통과해야 했다. 이과 출신 문과 출신 굳이 따지는 것도 우습지만, 평소에 접하지 않은 고급 영어 단어와 문법을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본인에게는 정말 어려운 도전이었다. 혼자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삼성에 같이 근무하던 영국에서 학교를 나온 동료를 포함한 비슷한 나이 또래의 뜻을 같이 한몇 명과 함께 스터디그룹을 만들었고, 약 1년여 서로 격려하며 어렵게 공부를 한 끝에 어느 정도 토플과 GMAT 성적을 받게 되었다. 암튼 그때의 성적으로 지원해서 미국 TOP30~50 사이에 있는 학교로부터 합격통지를 받을 수 있었다.


총 3군데에서 합격통지를 받았는데 한 군데는 미국 동남부 지역 버지니아주에 있는 The College of William and Mary라는 주립 대학교로 윌리엄스버그라는 작은 동네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도시는 우리나라로 치면 민속촌과 같은 전통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마을이 있는 곳으로 미국의 초기 본토 발견과, 남북 전쟁 당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서 미 전역에서 역사관광을 오는 도시이고, 덕분에 동네도 예쁘게 잘 꾸며져 있고 주변에 제임스 강도 유유히 흐르고 있어 아주 오래전부터 사업을 하고 은퇴한 백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미국 동남부의 유명한 은퇴자 마을이기도 했다.


합격 통지서를 보내 준 또 다른 학교는 뉴욕주에 있는 학교 한 군데와, 마지막에 통보가 온 또 다른 학교는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학교였다. 2개 학교 모두 한국 동문들이 좀 많이 있는 곳이었으나, 문제는 두 군데 모두 사립학교였고, 그에 따른 학비와 함께 생활비가 많이 드는 곳이라는 점이 부담이 되었다. 조금 외진 곳에 있지만, 버지니아에 있는 주립학교로 정하고 미국으로 향했다.


도전할 때에도 계속 선택의 순간이 밀려온다. 이럴 때 미래를 미리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한 가지 팁(Tip)이 있다면 내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런 도전을 했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첫째 나는 마케팅을 공부하고 싶어 MBA 학위를 하게 되었다. 둘째 나는 영어를 잘 못했다. 미국 학교를 가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은 영어 실력을 늘리기 위한 것도 있었다. 그래서 학교 선택을 할 때 기왕이면 한국 동문이 거의 없는 곳에 가야 영어가 늘 수 있다고 판단했다.


본인은 가족들보다 먼저 미국에 도착해서 렌트할 집을 구하고, 거의 폐차 직전의 중고자동차를 사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몇 달 뒤 이제 막 2살이 된 아들과 아내를 불러 내어 온 가족이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엔 동네 이곳저곳을 구경하면서 마치 관광객처럼 신기해하였는데, 입학 오리엔테이션 기간이 끝나가고, 진짜 수업을 하는 학기가 시작되면서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떨린 마음으로 참여한 첫 수업은 시작 시간부터 난관이었다. 교수들의 강의가 전혀 들리지 않은 것이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영어테이프로 듣던 그런 수준의 영어가 아닐뿐더러, 공대 출신인 필자가 과거 배운 적이 없는 경영학 수업이라 용어도 어려웠다. 게다가 미국에서는 학문 과정 외에 토론 수업을 즐기고, 각 수업마다 케이스 스터디(Case Study)라고 하여 어려운 문제에 부딪힌 경영의 애로점을 케이스로 만들어 각 팀별로 토론을 통해서 해결 방법을 찾아내길 원했다. 영어로 말 한마디 하는 것도 괴로운데, 토론을 통한 결론까지 내야 하니 이건 난관 중에 난관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미리 예습하는 길 뿐이었다. 한국어로 된 20페이지, 30페이지 케이스 스터디 리포트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데, 토론을 위해 영어로 된 리포트와 그와 관련된 전공과목 교재도 수십 페이지까지... 거의 매일 밤새서 미리 예습을 해서 수업에 참여해야 했다. 만일 내게 더 이상의 선택지가 있었다면 이렇게 노력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때 그 순간 나에게는 더 이상의 선택지는 없었고, 지금 이 수업에서 나오는 영어를 모두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목표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랬더니 그렇게 싫어하던 공부하는 습관이 루틴처럼 붙은 것이다. 세상에.... 밤에 공부하다가 코피를 흘린 것도 그때 난생처음 겪은 경험이었다.


수업 시간 중 제일 부러웠던 친구는 미국인도 아닌데 매일 손을 들고 토론을 유도하곤 했던 적극적인 한 유럽 친구였다. 그 친구가 하는 영어는 영어 수준이 높은 것도 같고, 억양이 좀 이상하기도 해서 잘 못 알아듣긴 했지만, 매일 그렇게 손을 들고 질문을 하는 것이 늘 부러웠다. 그런데 2학기 되어 영어에 귀가 좀 뚫리니 그 친구의 질문들이 수업과 상관없는 엉뚱한 질문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업시간에 적극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알아듣고 보니 수업을 방해하고 있던 것이다. 어쩐지 늘 교수님 얼굴에서 그 친구를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이었는데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 친구의 적극성만큼은 지금도 인정한다.


또 하나 괴로웠던 것은 자기들끼리(?) 미국 시사에서 나오는 얘기를 가지고 농담을 하는 것이었다. 2002년 당시에 엔론이라는 거대한 회사가 큰 회계부정을 저질러서 파산을 하는 지경에 이르는 사건이 있었다. 엔론(Enron)은 텍사스에 위치한 회사로 2000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가장 일하기 좋은 회사로 선정된 유망한 기업이었다. 그러나 그 회사의 회계는 대부분 부정으로 드러났고 2002년에 결국 파산을 신청하게 되었다. 세계적인 회계법인 아서앤더슨(Arthur Anderson)은 그 회사의 회계 감리 담당 법인이었다. 이 세계적인 회계부정 사건으로 인해 아서앤더슨 역시 문을 닫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아서앤더슨은 MBA 출신이 가고 싶어 하는 손꼽는 회계법인 중 하나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쪽 분야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평소에 그런 일에 별 관심이 없던 필자는 그 얘기가 수업에 나왔는데도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 팀 멤버 중에 한 명이 바로 그 아서앤더슨 회계법인에서 근무했던 경력자였던 것이다. 그 사건으로 인해 더 이상 회사에 근무를 못하고, 억대 연봉을 받던 사람이 우리와 함께 이렇게 수업을 듣게 된 것이다. 교수님이 학생들을 향해 그 사건을 예로 들면서 그 친구의 경험과 함께 뭐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던 것인데 남들과 같이 웃지 못해 처음엔 스스로 당황했지만, 나중에 알게 되면서 무척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하게 된 것이 신문을 구독하는 것이 추가되었다. 미국 동네에 가면 타운하우스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동전 몇 개를 넣으면 신문 한부씩 꺼내서 볼 수 있는 가판대가 하나씩 있었다. 매일신문을 사서 사회면과 경제면은 가능하면 다 읽으려고 노력을 했다. 토요일 신문은 다른 날 보다 좀 더 두꺼웠는데, 그 날에만 나오는 미국 쇼핑 쿠폰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쿠폰을 오려 가지고 주말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필요한 물건을 싸게 구입하는 소소한 경험도 하게 되었다.



영어로 표현하는 것 중에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병원에 가서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필자의 둘째 아들은 미국에서 태어났다. 유학 중에 생긴 소중한 아이였고, 다행히 학생 보험이 있었기 때문에 전체 비용의 절반 정도는 보험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부인과 용어를 전혀 몰랐던 필자에게 아내의 통증을 현지 의사에게 설명하는 것은 또 다른 도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말이 안 통할 때는 만국 공통어가 있다. 바로 보디랭귀지였다. 외국인 특히 아시안이 흔하지 않은 동네여서였는지, 노란 머리 미국 의사들은 항상 친절했고, 잘 모르는 용어를 보디랭귀지로 표현해도 모두 알아들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첫째 아들을 낳을 때 많이 힘들어했던 아내는 미국에서 무통분만을 선택했다. 한국에서처럼 그런 옵션을 선택할 때 담당의사가 그대로 처치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금방 조치를 해 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무통분만을 하려면 마취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마취의 사는 같은 병원에는 없고 한참 멀리 있는 병원에서 별도로 와야 했던 것이다. 처음엔 무슨 소리인 줄 몰라서 마냥 기다려야 했고, 아내의 진통이 시작되었지만 의사는 기다리라고만 하고... 점점 발만 동동 구르며 긴장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새로 태어난 아기는 이름이 없기 때문에 태어나지 마자 병원에서 발목에 이름표를 달게 되는데 처음에 무슨 뜻인가 했다.

"Son of Son"

아들의 아들? 아이를 낳은 기쁨과 흥분 때문에 그 자리에서 이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질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동안 아내가 제출한 진료 서류에 남편 성이 아닌 여권에 있는 그대로 아내의 성과 이름을 적었고, 아내는 손 씨이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우리 모든 가족의 Family name이 Son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미국에서는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라가는 그런 전통이 있기 때문에 아마 그런 것의 영향이었던가 보다. 아무튼 뭐든 다 신기했던 경험이기도 했다.


무사히 아이를 낳은 후, 흥분도 잠깐 나중에 계산서가 집에 오는데, 아내를 진료하고 아이를 낳기까지 방문했던 각 의사가 속해 있는 여러 병원에서 따로 청구되어 왔다. 한 번에 모두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수개월 동안, 이 병원 비용, 저 병원 비용, 그리고 보험이 되는지 안되는지 모두 확인해야 하는 청구서들이 쏟아져 오고 있었다. 청구서들이 오랜 기간을 두고 끊임없이 오다 보니 도무지 예측이 불가능했다. 청구서 액수도 액수지만 도무지 끝이 나질 않으니, 하도 열을 받아 결국 병원에 전화해서 이렇게 물어봐야 했다.

"이제 한국으로 귀국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더 내야 할 돈은 얼마나 되는 건지 지금 알려주면 안 되겠니? 차라리 모두 내겠다."

답변은 이렇다.

"네가 가진 보험이 학생 보험이라, 우리가 제공한 의료서비스가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지 모두 검토되느라 늦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으니 기다려라."


돈 내겠다는 사람은 마음이 급한데, 돈을 받아야 하는 병원 측은 참 느긋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미국 문화를 보면 이런 경우가 참 많다. 운전면허를 신청하려 해도 서류 검토 시간이 길어도 너무 길다. 그러나 프로세스 진행은 정확하다. 시간에 쫓겨 실수하는 것보다 조금 늦더라도 정확하게 마무리되는 것이 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때가 많다.



영어로 상담이 쉽니? 아니면 면접이 쉽니? 차라리 상담이 쉬웠다.


MBA는 대학원 석사과정이다. 물론 학교별로 1년짜리 코스도 있지만 대부분 2년 4학기의 과정을 밟게 된다. 미국에 도착해서 지낸 1학년 과정은 그야말로 정신없이 흘러가느라 주변에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못했다. 2년 차가 되면서 우연한 기회에 학교에서 조교자리 제안이 들어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조교자리 공고가 났고, 나는 지원했고, 그리고 뽑혔다. 이 글을 읽은 분들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에게 이 무슨 경사스러운 소식인가?


한국에도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 중에는 조교를 통해 일부 생활비나 등록금을 벌기도 한다. 대개의 경우 조교란 교무실에서 잡일을 하며 도와주거나, 공부 잘하는 학생들 중에는 TA라고 해서 Teaching Assistant의 역할을 하는 조교도 있다. 그럼 본인은 어떤 조교를 했던 것일까? IT센터의 조교였다. 정확히 말하면 학생들이 잘 못 다뤄서 문제가 생긴 노트북 컴퓨터를 고쳐주는 일이었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엄청난 컴퓨터 실력의 소유자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 그건 절대 아니다.


예를 들어보겠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다. "남자라면 모두 전구를 갈 줄 알아야 한다."라고 누군가 말했다면 아마 상당수가 그런 얘기를 할 것이다. '아냐 우리 오빠는 절대 못해.', '무슨 소리야? 우리 아빠는 형광등 가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어.'... 맞다. 전기를 선천적으로 무서워하는 사람 의외로 많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문과 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경향이 더 있다. 본인은 어쨌든 간에 공대를 나왔고, 학생 때부터 혼자 자작으로 만들어 본 컴퓨터도 몇 대 되었다. (뭐 특별한 능력은 아니다. 그 시절 그런 친구들 많았다.)


본인이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2002년부터 2004년까지는 인터넷이라는 것이 막 확장되어가던 시절이다. 한국에서도 다양한 인터넷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고, 사건 사고도 많았다. 특히 2000년은 밀레니엄 버그라고 해서 전 세계 컴퓨터가 다운될 것을 우려하는 일도 있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윈도 98에서 윈도 Me 버전이 만들어지는 등 컴퓨터의 OS(Operating System)도 그런 우려 때문에 계속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다. 그런데 인터넷의 확장에 따른 폐해가 있었으니 바로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하는 방식이었다. 요즘이야 LTE나 5G, WiFi 같은 프로토콜이 많이 발전했지만, 예전에는 ADSL 같은 전화선으로 겨우 데이터를 받는 것이 최선이었고, 그러다 보니 큰 데이터를 조각조각 나눠서 받게 하는 토렌트 서비스도 많았다.


문제는 그런 프로그램 중에서 양질의 정식 프로그램이 아닌 음성으로 받거나, 음란물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는 데에 있었다. 정품이 아닌 제품에서는 종종 바이러스가 나타나고, 실제로 학생들 사이에서 그런 바이러스 때문에 먹통이 된 컴퓨터가 의외로 많아서 IT센터를 찾아왔다. 물론 일부 학생들은 프로그램 설치나 설치된 프로그램의 구동을 물어보러 오는 경우도 있었다. 쉽게 말해서 본인은 조교였지만, 굳이 말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정품 바이러스 퇴치 프로그램을 들고 다니면서 컴퓨터를 한 대 한 대 고쳐주면 업무는 끝났다. 또는 새로운 컴퓨터의 동작을 위해서 학교에서 권장하는 프로그램을 깔아주는 것이 다였다.


사실 조교에 도전하는 것이 어려웠지 도전하고 나니 그 결과는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보상이 따라왔다. 첫째 주립대학교 학생 중에 해당 주에서 태어나거나 일하는 학생들에게는 등록금이 반값으로 줄어들었다. 외국인이었던 나에게는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둘째 2주에 한 번씩 몇 백 불의 별도 장학금 명목으로 일한 대가가 나왔다. 미국에서 돈을 벌면서 학교를 다닐 것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로 인해 아시아 변방에서 온 관심 밖 학생이었던 나에게 많은 친구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본인에게 컴퓨터를 가지고 오는 학생들은 수업시간에서 만큼은 정말 날고 기는 우수한 학생들이다. 그런데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걸렸거나 자기 실수로 동작이 멈춰버렸을 때는 마치 환자가 의사를 보러 오듯이 수줍게 방문을 노크하고 들어왔다. 평소에 눈길 한 번도 주지 않았던 친구들도 그 날 만큼은 나한테 많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학생들 중에 정품이 아니거나 이상한 파일을 받다가 문제가 생긴 것을 들키기라도 하면 더 친절하게 나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원래 비밀을 공유하면 더욱 친해지기 마련이다. 그동안 서로를 잘 몰라서 못 나눴던 얘기 또는 컴퓨터 문제에 대한 상담을 하게 되면서 여러 친구들과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최소한 당시 컴퓨터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자신 있는 한국의 삼성전자 출신의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삼성을 퇴사까지 하면서 미국까지 와 학위를 할 때에는 이왕이면 미국에서 취직자리를 찾아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미국은 특이한 게, 각 회사의 인사팀에서 면접을 하는 것이 아니고 각 회사에서 근무하는 그 학교 출신의 동문에게 면접을 직접 진행하게 하는 시스템이었다. 졸업하기 1학기 전부터 각 회사에 연락을 해서 취업을 위한 전화면접을 신청했다. 규모는 작지만, 미국 역사상 하버드대학 다음에 설립된 이 학교는 2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오래된 학교이다 보니 미국 전역에 있는 유명한 회사마다 중역을 맡고 있는 동문들이 많이 있었다.


생각보다 쉽게 원하는 기업들에서 근무하는 동문들과 면접 약속이 되었다. 한국 사람이 거의 없는 미국의 촌구석에서 공부를 해서 그랬는지, IT 조교를 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영어는 좀 늘었던 모양이다. 당시 미국의 IT업계를 주름잡았던 IBM, 인텔, DELL 등에 있는 동문들과 면접을 하는 과정에는 다들 나와의 면담에 대해서 만족해했다. 그런데 그 동문들의 마지막 질문이 모두 같았다.


"너 혹시 그린카드 있니?"


그린카드(Green Card)는 영주권을 의미했다. 한국에서 온 학생이 미국에서 MBA를 했고, 삼성전자 출신이라 전문적인 경험이 있다는 것은 모두 만족해했는데, 미국에 취직하려면 자국민이나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이 우선이었다. 처음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같은 질문을 연속으로 받게 되니까 점점 부아가 나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면접을 했던 컴퓨터 업체 DELL 담당 동문에게 똑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에 일부러 항의를 해봤다.


"당신의 회사는 외국인이라고 차별을 하는 것 아닌가요? 실력으로 검증을 받아야지 외국인이라고 안 뽑는 것은 차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 회사는 인종이나 성별 등 모든 것에서 차별이 없는 회사입니다."


아마 이런 항의는 듣는 사람 입장에서 좀 의외였던 모양이다. 그 동문은 처음엔 당황한 듯했지만, 매우 전형적인 대답을 했다. 물론 이런 식의 답이 돌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나 사실 답답한 마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한 시간 정도 차로 떨어진 지역에 있는 한인 교회에 출석을 했었다. 그곳에서 우리 가족을 너무 사랑해 주셔서, 미국에 남을 수 있도록 변호사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 작은 회사에라도 취직할까 아니면, 취직 말고 한국인이 하려는 프랜차이즈 식당 공동운영, 또는 교회 내 한인학교 설립 등 여러 가지 방안도 고민해 봤었다. 이런저런 고민 중이던 찰나, 신기하게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삼성에서 다시 재 입사 제의를 해 준 것이다.


'아마 운명인가 보다...'


이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는 것 또한 기대케 하고 있었다.



미국에서의 경험은 그야말로 한 순간 한 순간이 모두 도전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유학생활을 소개하는 조그만 책을 한 권 만드는 것도 도전했었다. 출간용 책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그때의 기록을 찾는데 도움이 많이 되고 있다. 다시 한번 권면하고 싶다. 우리는 모든 세상을 다 살아보지 못한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포기하기보다 시도해 보고 실패든 성공이든 경험을 쌓는 것이 더욱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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