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를 찾다

39년여간의 긴 여정을 끊으며

by 햇살가득

열정과 노력과 인내의 파란만장했던 고등학교 교사, 교감 시절을 거쳐, 나의 학교경영 목표와 신념을 2년간 즐겁고 보람 있게 펼칠 수 있었던 00고 교장으로 지난 8월 말일, 정년퇴임한 지 벌써 17일째다. ​


교장으로서 가장 보람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며드는 교육'이라는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나는 학생들의 꿈을 키우는 환경을 만들고자 했다.


건물 5층 외벽에 14개 글자로 된 학교 비전을 설치했고, 4개월마다 시(詩)가 담긴 대형 걸게시 판을 교체하며 감성교육을 시도했다.


짧은 거리지만 산책로도 만들었다. 점심시간, 교직원이나 학생들이 도란도란 걸으며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랐다.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를 중시했다. 입학식과 졸업식, 그리고 퇴임식에서는 내가 직접 PPT를 제작하고 학생들과 눈을 맞추며 연설했다. 교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을 경청했고, 협의회를 통해 결정을 내렸다. 시스템을 보다 더 정교하게 하기 위해 사람과의 소통을 우선했다.​


대학 졸업 후 내년 2026년 2월이면, 만 40년 세월이다. 고등학교 교단에서만 어언 39년의 시간을 열정 바쳐 보냈다.


자주 야근했던 시간을 포함하여 매일 8시 출근, 밤 10시 넘어 퇴근, 직장 생활을 빈틈없이 해오던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나 스스로 시간을 꽉 짜서 생활해 왔던 직장 생활의 리듬이 고착화되어 있었다. ​


그런데, 지난 5월부터 내게는, 당장 퇴직이 시작되는 9월 1일부터 내게 덩그러니 내던져질 그 수많은 시간들을 잘 견딜 수 있을까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고민이 불현듯 교차하곤 했다.​


왜냐하면, 지난 39년여간의 직장 생활의 리듬으로부터 급격한 단절(斷絶) 상태에 놓이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내게 주어진 텅 빈 시간들을 어떻게 나 스스로 관리할 것인가?


그래서, 퇴임 후의 하루 일과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월요일~일요일까지 시간대 별 일과표를 지난 7월에 작성해 보았다.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을 작성해 놓고 해당 항목을 때로는 대신 바꿔 가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


크게 보면, 운동(스트레칭, 걷기, 탁구, 자전거 타기), 요리, 도서관 강의 듣기, 독서 및 글쓰기, 주 1회 오전 대학병원 자원봉사활동과 저녁 합창단 합창 연습, 여행, 엄마 면회나 손주들 만남, 수년간 이어온 다양한 모임 참여 등이다.


그런데, 9월 1일부터 일상적인 일보다는 갑자기 생기는 일들이 더 많았다.​


전화기 알림 문자 수시로 열기, 치과 검사 및 치료, 지인 자녀 결혼식 참석, 지인 부모님 장례식장 방문, 병원 검사 및 진료, 자동차 정기 점검 및 수리, 보험사 인터넷 정보 검색 및 계약서 작성 등 때문에 예상했던 시간대 별 계획은 겨우 절반 정도만 수행되는 듯하다. ​


시간 일정표대로 진행되기보다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비틀린 형태지만 무한한 연속성을 갖고 일정은 되다 말다 한다.​


작년 가을부터 남편은, 내가 글 쓰는 것을 좋아하니까, B 앱을 활용해 보라고 조언했다. 그런 앱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서, 타인의 글을 읽어본 경우는 있으나 내가 거기에 직접 글을 쓰기 위해 접근해 본 적은 없었다.


전자 매체에 글을 쓰면 익명의 사람들이 읽는다는 것은 뭔가 정확히 표현하기 어렵지만 나를 세상에 드러낸다는 것으로 보아 막연한 어떤 불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퇴직을 코앞에 둔 올해 8월 중순, 남편은 내게, 그럼 N을 활용해 보라고 적극적으로 권하였다. 그런데, 이번 8월에는 비가 자주 많이 내려서 학교에서 물난리 사건을 호되게 치렀다.


이를 계기로 물난리 현장과 사건 처리 과정에 관한 글을 그때그때 메모하고 에세이로 만들어 카톡 방 지인들에게 공유했더니, 다양한 반응의 평가 회신을 받았다.


그 회신들에 고무되어 ‘학교에 웬 물난리?’를 8월 16일 N에 처음으로 올리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N 매체 표지 이름 옆에는 816이 붙게 되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이 있듯이, 그 뒤에도 연속해서 몇 편의 에세이를 블로그에 올렸다.


진한 검은 먹물을 붓에 묻혀 부드러운 화선지에 한 방울 툭 떨어뜨릴 때, 그 화선지에 번지는 먹물과도 같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 어떤 인상이나 생각의 끈을 만나면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계속 움직이곤 한다. ​


일상을 소재로 틈틈이 써 놓았던 짧은 에세이들을 끄집어내어 읽어보고 집중해서 퇴고한 뒤 전자 매체에 올리고 있다.


퇴직하기 직전부터 공식적으로 전자 매체에 에세이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마치 타는 목마름으로 망망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처럼 엄청난 행운이었다.​


퇴직이 두렵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즐겁고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매우 설렜다. ​


"끝은 또 다른 시작이야!!"


오아시스에서 나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저는 블로그에서 필명 '햇살 든 베란다'로 같은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제 글벗이 되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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