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우리 엄마! 엄마~~!

by 햇살가득

2020년 설날, 마지막 가족사진


코로나19가 막 시작되던 2020년 1월 설날, 늘 그렇듯, 4대 장손 외며느리인 나는 시댁에서 차례 지내고 덕담을 나누다가 1시 즈음 친정으로 갔다.


부모님과 4남매 가족들이 거실에 모였다. 우리 두 아들과 조카 8명, 그리고 언니의 큰며느리까지 함께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흡족해하시는 부모님!! 세배받고 세뱃돈과 함께 즐거운 덕담을 나누고 가족 전체 두세 줄로 앉아, 하나, 둘, 셋, 찰칵! 모처럼 오랜만에 가족 스냅사진을 찍었다.


그 뒤 2월, 나의 큰아들 결혼식 날! 대학병원 일반외과 정교수로 환자에게 섬세하고 친절했던, 183센티미터 훤칠한 키, 균형 잡힌 몸매, 고은 피부에 웃으면 늘 보조개가 피고, 무조건 아이들이라면 아무나 이뻐했던 50대 초반의 내 큰 남동생을 그날,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다.



급작스러운 이별


그 뒤, 딱 2주 후, 큰 올케로부터 날벼락같은 연락이 왔다.

"형님~! ㆍㆍㆍ애들 아빠ㆍㆍㆍ, 사망 신고 ㆍㆍㆍ 해야 한대요."


아이고~~~! 아버지와 엄마가 이 사실을 아시면 어떡하나! 어떡하나! 어떡하나! 큰 올케와 조카 4명은 어쩌나! 어쩌나! 그런데, 왜 내 남동생이?


" 급심정지!! "


우리는 목 놓아 며칠을 울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으나, 엄마와 아버지는 전혀 믿어지지 않으셨는지 한 방울의 눈물도 못 흘리셨다. 며칠, 몇 달, 몇 년이 지나도록 하나도 울지 못하셨다! 엄마는 혼이 빠지셨다. 화장장(火葬場)에서도 엄마는 정말 딴사람이셨다!


큰아들의 뜨거운 뼛가루가 담긴 도자기를 보며 아버지는 그제야 조용~히 눈물을 훔치시며 몸을 비틀거리셨다. 내가 아버지 왼팔을 붙들고 걸어갔지만, 아버지의 옆모습에서는 현실이 느껴지지 않는 막막 감만 감돌았다.



병상의 롤러코스터를 타시는 우리 엄마!


코로나19 시국이 장기화되다 보니 모든 일이 난관, 난관, 난관이었다.


엄마는 평소에, "큰아들이 효자야. 효자!"라고 침이 마르도록 언니와 내게 말씀하셨었다. 그러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했던 큰아들의 부재(不在)로 넋을 잃고, 식음을 전패하고, 약도 전혀 안 드시고, 누워만 계시다가도 알아듣기 어려운 헛소리를 하셨다. 열이 39~40도를 오르내려 응급실을 들락날락하셨다.


엄마의 상태가 너무너무 심각해서 아버지는 큰아들을 졸지에 잃고도 그 슬픔을 내색조차 못 하셨다.


코로나19 시국이 이어지던 2022년, 엄마는 거실에서 넘어지셨다. 갈비뼈 하나가 부러지고 허리 두 곳이 골절되었다. 허리 시멘트 시술 후, 두 곳의 요양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구강암 초기'가 발견되어 구강암 수술 후 다른 두 곳의 요양병원을 두세 달 전전해야 했다. 지금은 엄마가 요양원으로 가신 지 벌써 3년 차가 된다. 그 사이에도 사경을 헤매던 담관 담낭 염증 수술과 뇌경색 치료를 받으셨다. 욕 잘하는 예쁜 치매(가족을 다 알아보고 대화 가능)가 발견된 지는 10년이 넘었다.



엄마의 청춘, 희생의 시간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4남매를 살뜰히 키우신 엄마. 48세 때 꿈이 생겼다. 경제적 소득이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하셨다.


막내 남동생까지 수월하게 서울 법대 합격 후, 엄마는 아는 지인의 소개로 보험회사 영업직을 10여 년 종사하셨다. 회사 일이 끝나면 엄마는 항상, 약사인 큰딸이 경영하는 약국으로 가셨다. 약국 직원들에게 식사를 만들어 차려 주는 일부터, 약품 배열, 물건 상자 정리, 재활용 분리수거, 창고에서 물품 가져오기, 청소, 설거지 등, 각종 일을 도우시며 일하는 즐거움에 늘 무척 행복해하셨다.


요양원에서 누워 계신 엄마를 보며 문득 생각난다.


1938년생이신 엄마는 6명의 손위 외삼촌과 맨 위 큰언니, 아래로 막내 여동생이 있는 둘째 딸이다. 국민(초등) 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에 6ㆍ25 전쟁을 겪었다. 그런데, 비극이 닥쳤다. 공무원이던 나의 셋째 외삼촌이 마을 공산당원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총살을 당한 것이다. 외할머니는 충격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버리셨다. 어린 엄마가 집안 살림을 모두 떠맡게 되었다.


1950년대 당시, 한국은 전쟁 폐허 속에, 변변치 않은 농업이 국민 대다수 삶의 터전이었다. 대다수의 한국 여성들이 그 당시 그러했듯이 10대 나이의 우리 엄마도 눈만 뜨면 농사일, 식사 차리기, 이불 빨래, 길쌈하고 옷 만들기, 뜨개질, 청소, 부모님 병시중 등등의 살림살이에 매이셨다. 결국 초등학교만 다니시고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엄마는 배움에 대한 한이 가슴에 맺히게 되었다.


한편, 3살 어린 여동생, 우리 이모는 중학교를 입학하고 공부하게 되어 우리 엄마는 더더욱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외삼촌들 뒷바라지 가정 살림에 매이게 되어 그 한이 더욱 크게 가슴에 맺히셨던 것 같다.


엄마의 정성 어린 자녀교육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1970년, 내가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하던 때에 엄마는 지극 정성으로 나의 등 ㆍ하교에 동행하셨었다.


1, 2학년 때 나는 학교에서 말도 너무 없고 학교 수업을 겨우 따라갈 정도여서 엄마는 내게 받아쓰기를 시키고 구구단을 시시때때로 외우게 하고 숙제 검사도 꾸준히 해주셨던 것 같다.


3~6학년 때는 1년에 1~2번씩 엄마는 학교 방문을 하고, 늘 모든 수업마다 열심히 발표하는 나를 본 뒤,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가셨었다.



병원 침대 위 엄마


최근 1주일 전, 엄마가 계신 요양원에서 언니에게로 급한 전화가 왔다. "어머님께서 혈당이 380까지 올라서 지금 입원하셨으니, 보호자 동의서가 필요합니다."


언니가 보낸 이 문자를 받는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으로 갔다. 의사를 만나 보니 '고혈당'에, 빈혈에 신장염과 요도염에 약간의 폐렴까지..... 엄마의 몸이 이렇게 망가져 있었다니!


엄마는 앙상한 뼈만 남은 상태로 약에 취해서인지 아무리 불러도 무반응이었다! 한참 후 눈만 살짝 떴다가 감으시는데, 우리를 몰라보시는 것 같았다.


하루 일과 중 1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고 바지런하고 알차게 생활하신 그렇게 팔팔했던 우리 엄마!! 지금은, 얇게 축 늘어진 살가죽과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자신의 몸도 가눌 수 없는 유병장수의 시계 추를 달고 누워 계신다.


아이고~! 우리 엄마! 엄마~~!




저는 블로그에서 필명 '햇살 든 베란다'로 같은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제 글벗이 되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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