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Sticky Not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CHO Apr 27. 2021

사람이 살고 있었고,
지금도 살고 있다.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 (박건호 저)'를 읽고

살면서 존경할만한 인생의 스승을 만나기란 참 쉽지 않다.


40년이 조금 넘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다행히 나는 두 명의 인생의 스승을 만났는데, 그중 한 분은 나의 고등학교 국사 선생님이셨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우리 학교에 계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확실한 것은 아마 우리 학교의 선생님들 중 가장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던 분이실 거라는 점이다. 나름 자존심이 강하고 개성이 뚜렷해 모래알처럼 뭉쳐지지 않았던 우리 고등학교 동문들에게 '최고의 교사'로 인정받는 유일한 분일 거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0년 동안 결혼해 미국에 와서 애 키우고 남편 서포트하며 살면서 사실 선생님의 기억은 과거 그 어디쯤에서 서서히 지워져가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거의 유일하게 연락하고 지내는 고등학교 동문을 통해 선생님의 소식을 들었다.


아픈 역사도 역사이니까.. '이완용 붓글씨'를 소장하는 이유?




뵙지 못한 동안 나는 선생님이 학원 강사로서만 살고 계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동안 컬렉터로서의 삶 또한 살고 계셨고, 그 결과가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한 것이었다!



그때 그 시절, 우리는 왜 교사 박건호에게 열광했나


이 책을 읽으며 암울했던 고딩 시절, 왜 우리가 그토록 박건호 선생님을 사랑했었는지 희미하게만 남아있었던 기억이 점점 또렷해는 느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0년이 훌쩍 지났건만, 아직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자율학습, 고요한 복도의 정적을 깨고 퍽퍽 터지는 자율학습 감독 교사들의 둔탁한 매질 소리, 그리고 '자율'학습이 실은 '타율'임을 상징하는 학교 출입구에 매달은 쇠사슬이다. 얼핏 들으면 감옥이 연상되는 환경에서 성적표의 숫자와 싸웠던 우리들에게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는 학교 지하 과학실에서 진행되는 박건호 선생님의 국사 수업이었다.

국사 수업을 과학실에서 진행하다니? 뭔가 이상하지만 그 어두컴컴한 과학실은 우리에게 초기 기독교인들이 몰래 예배를 보던 카타콤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선생님이 찍어온 솟대, (춘화를 포함한) 민화, 탑 컬렉션 등을 슬라이드로 보았다. 교과서에 박제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과 작품들이 생생하게 우리 앞에서 살아 숨 쉬는 순간으로 기억한다. 선생님은  그렇게 뼈다귀만 남은 과거에 숨을 불어넣어 뜨거운 피가 흐르고 보드라운 살결을 붙이는 데 탁월한 분이었다. 자랑스러운 역사도, 부끄러운 역사도 모두 현재의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있음을 가르치셨고, 이러한 거대한 '역사'라는 물줄기에서 한 개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으로 던지셨다.


과거가 살아났다!


이 책 역시 14점의 수집물을 통해 과거에 숨을 불어넣는, 선생님의 장기가 그대로 녹아있는 작업의 한 형태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에게 25년 전, 과학실에서 봤던 슬라이드 같은 존재이다. 

안중근 의사와 같은 역사적 인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혹독했던 조선 말기에서부터 유신 시절을 살아 낸 민초들의 소소한 기록들을 근거 삼아 그들의 삶을 거꾸로 유추해나가는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그 당시의 삶에 숨을 불어넣는다. 이들의 이야기는 소소하지만, 역시 소소한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준다.

  

나는 자의에 따라 미국인이 되었고, Eunyoung Cho가 되었다. Sarah라는 미국식 이름으로 살까 심각하게 고민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엄마 아빠가 주신 Eunyoung이라는 이름과 미국식으로  남편 성을 '선택'했다. Korean American으로 미국에서 살면서 K-Pop과 K-Drama로 상징되는 K-Brand 문화 강국 출신으로 유례없이 주위의 부러움과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다. 15년 전, 미국에 처음 왔을 때 'Korea'=북한으로만 생각했던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다. 

이 책에서 유일한 역사적 인물인 손기정 선수, 올림픽 기록 상으로 '기테이 손'으로 남아있는 분은  타의에 의해 본명을 잃었지만, 한국인 손기정으로서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했었던 점은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제 강점기는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지만, 그 부끄러운 시절을 손기정 선수는 정말 자랑스럽게 살아내셨다. 역사가 부끄럽다고, 그 시절을 산 사람들의 삶 또한 모두 부끄러웠던 것은 아니다.

친일파와 독립 운동가들만 살았을 것 같았던 일제 강점기에도 그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시류에 따라 소소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었고, 전쟁 중에도 생계를 위해 꽃을 파는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우리의 눈이 아닌 그 시대의 눈으로 읽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생각보다 정치적이다.

남녀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는 것은 인류가 생긴 이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인류 역사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큰 줄기인 셈이다. 이것이 역사의 거대한 본류이고 정치적 사건들은 오히려 지류 같은 것이어서, 자칫 인류의 사랑, 결혼, 출산 같은 일들이 정치와는 무관한 것처럼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산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수혜자이자 생산자이다.

그 혹독한 90년대 말 고딩 시절을 겪어내고 우리는 대학에 진학하여 누구는 판검사 혹은 의사가 되었고, 누구는 아나운서가 되었으며, 누구는 군인이 되어 꽃다운 나이에 조국의 하늘에서 산화했다. 혹은 나처럼 아직도 방황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가장 정치적으로 힘들었던 시기를 치열하게 싸워준 선배들 덕에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10대와 20대를 보낸 최초의 세대이다. 더불어 가장 정치적인 40대를 보내고 있다. 각자 맡은 역할과 처지는 다르지만 우리는 이 시대의 x세대 사회인으로 코로나 시대를 제법 잘 살아내고 있다고 자부한다. 


한국인으로서 우리 모두가 겪은 가장 최근의 정치적인 사건은 탄핵과 촛불 혁명이다. 이 지류들을 역사적 본류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2021년 4월 26일

ECHO


사족.

1.  이 책이 진심으로 많이 팔리길 바란다. 그래서 더 많은 인세를 받으시게 되길. 그러면 선생님은 받은 인세를 분명 수집 활동에 몽땅 쏟아 넣으실 그런 분이다.  그러면 이 책의 2권, 3권 등도 시리즈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의 이야기는 끝이 없으니 말이다.  

2. 이 책은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에게 꼭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한국말로 된 이 책이 쉽지 않겠지만, '미스터 션샤인'으로 관심을 갖게 된 의병 파트부터 하나씩 읽어줄 생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국제 시사와 영어를 함께! CNN 1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