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영웅이 '아픈 손가락'을 대하는 법

그분들의 50년을 축하하며

by ECHO

우리와 가깝게 지내는 70대 노부부가 계신다.


그 시절 대부분 그랬듯이 이 분들도 젊은 시절을 정말 치열하게 사셨다. 그 덕에 할아버지는 세간에서 말하는 ‘업계의 성공 신화‘를 일구신 분이시고, 할머니는 남편이 커리어를 성공적으로 마치는 마지막날까지 최선을 다해 보조하셨다. 그 덕에 현재 만족스러운 노후를 즐기고 계신다. 두 분이 알콩달콩, 건강도 챙겨가며.


이 분들에게는 손주가 있다.

이 아이는 첫 손주라 양가의 사랑과 기대를 독차지했다. 게다가 어찌나 방끗방끗 잘 웃는지.. 이 노부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였으리라.. 이 첫 손주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한창 일하실 때였음에도 할아버지에게는 회사 다음이 이 손주였다. 이 노부부는 손주가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은 웬만하면 다 해 주시려고 노력하셨다.

그런데 이 손주가 서너 살이 되면서부터 서서히 말을 안 듣기 시작했다. ‘미운 7살’은 정말 최악이었다. 뭐든 자신의 뜻대로 안 되면 무조건 드러누워 악다구니를 썼다. 아무리 아이를 안고 어르고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아이와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결국 할아버지는 회초리를 들었다. 그럼에도 막무가내였다. 매를 든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겁만 줄 뿐 차마 손주를 때리지 못하셨다. 대신 이 회초리로 당신의 애매한 허벅지만 치셨다.

이렇게 말 안 듣는 손주가 유치원에 갔다. 손주는 유치원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때려 쫓겨나는 일이 빈번했다. 학교에 가고 나니 손주의 학교 생활에 대해 자식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이 노부부가 따로 해 줄 것은 없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할머니는 절에 가서 기도를 드리셨다. 절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는 손주 또래의 아이들이 많았다. 형편이 허용되는 내에서 할머니는 열심히 기부를 하셨고 봉사도 하셨다. 당신 손주 또래의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덜 굶기를 바라며.

방학 때 손주가 오면 손주가 좋아하는 음식을 잔뜩 해 놓고 기다리셨다. 아이 키우느라 힘든 아들 며느리가 잠시라도 마음 편하게 쉬라고 당신이 아이를 전담해 돌보셨다. 아직 은퇴 전이었던 할아버지는 주말에 짬이 나면 당신이 아이를 전담해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셨고, 은퇴를 하신 후엔 손주의 방학 때마다 당신도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


할머니의 육아가 '전통적인 방식'이었다면 할아버지의 육아는 '적극적인 참여'였다.

할아버지는 손주의 문제집을 들고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아이의 수학 문제집을 먼저 푸셨다. 기억이 희미한 수학 용어와 개념을 찾아가며 그렇게 먼저 공부하셨다. 그러고 얼리버드인 손주가 6시에 일어나면 그 아이를 데리고 아침 먹기 전 2시간 동안 공부를 시키셨다. 아이가 하기 싫어 이리 빼고, 저리 빼면 할아버지는 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상으로 주겠노라 약속하셨다. 손주는 매 번 버스를 타고 ㅇㅇ에 가고 싶다고 딜을 하였고, 2시간 공부를 잘 마치고 나면 이 아이와 함께 버스를 타고 여기저기를 누비셨다.


그렇게 사랑하는 손주였기에 이 노부부는 아이의 ’ 모습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이의 부모보다 더 먼저 받아들이셨다. 손주에 대해 누구보다 기대가 높았었지만, 아이에게 한계가 있음을 제일 먼저 인정하셨다. 아이의 지적/사회적 성장이 느림에도 불구하고, 손주의 ‘느림’에 대해 조바심을 내거나 재촉하는 대신 부모를 설득했다.

조바심 내지 말고 기다려라. 나도 늦된 아이였단다.

아이의 부모에게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할아버지는 힘주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당신들이 스스로에게 하는 이야기였는지도 모른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손주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이 분들은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손주를 걱정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두 분은 절대 당신들의 조바심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대학이나 진로에 대해 일절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다.

마침내 손주가 취직을 하고 첫 월급을 받았다. 손주는 월급의 일부를 빳빳한 새 돈으로 바꾸어 어른들께 용돈을 드렸다. 두 분은 이 용돈을 진심으로 기쁘게 받으셨다. 그리고는 말씀하셨다.

이제 더 이상 호야 걱정은 안 하련다.
이렇게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앞으로도 잘해 줄 것이라 믿는다.

라며 활짝 웃으셨다.


맞다.

이 노부부는 호야의 할매할배, 나의 시부모님이시다.



발달 장애아이를 둔 많은 부모님들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는다.

모든 상처들이 아프고 쓰리지만 가장 여물기 힘든 상처는 가족에게 받는다. 내 아이 때문에 사랑하는 내 부모와 형제에게서 상처받는 일이 공공연하게 일어난다. 우리도 약간의 시행착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곧 친정과 시가 어른들, 그리고 형제, 자매들 모두 호야를 생긴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인정해 주셨다.


양가 가족들에게 ’아이 잘못 키웠다’라는 소리를 들을까 두려워 아이가 조금만 잘못해도 내가 더 먼저 오버하며 야단을 쳤다. 먼저 설레발치는 내 모습이 안타까워 친정에서는 아무 소리 못 하셨고, 선제적으로 야단맞는 호야가 안타까워 시댁에서는 나를 제지하셨다. 제일 말을 안 들었던 미운 7살 때, 호야는 말을 지지리도 안 들어서 어머님, 아버님 앞에서 혼나다가 급기야 아버님께서 회초리를 드신 적이 있다. 이 날 아버님은 이 회초리를 차마 호야에게 대지 못하셨다. 대신 당신을 치셨다. 옆에서 보다 못해 내가 애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 호야한테 손을 댔다. 시어머니께서 급하게 방으로 들어오시더니 내 등짝을 세게 후려 치셨다.

어디 할매, 할배 앞에서 애한테 손을 대노!

한 마디 하시고는 호야를 안고 나가셨는데, 그때의 그 고마움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애들이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1년에 한 번, 2년에 한 번 정도는 방학 때 한국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안 들어가는 방학에는 양가 어른들이 오셨기 때문에 방학 때는 우리 아이들은 할매, 할배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육아에 참여하고 싶어 하셨기에 큰 아이 수학은 아버님께, 작은 아이 한글 공부는 어머님께 맡겼다. 문제집을 안겨 드리고 애들 공부 좀 봐주십사 부탁했다.

어머님이랑 받아쓰기를 하면서 애들의 한글 실력이 점점 나아졌다. 아버님은 더 열성적이셨다. 출근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출근 시간보다 한 시간 먼저 일어나셔서 영어로 된 손자의 수학 문제집을 미리 풀어 수업 준비를 하셨다. 영어 사전을 옆에 놓고 모르는 수학 용어를 찾아가며 말이다. 그리고는 호야가 일어나면 간단하게 과일로 이른 아침을 먹이고는 수학을 가르치시고 출근하셨다. 이 수업을 잘 마치거나 숙제도 잘 해 놓으면 호야에게 상을 주셨다. 우리가 한국에 있을 때는 호야가 좋아하는 피자, 치킨, 닭백숙을 사 주러 서울과 경기도 곳곳을 데리고 다니셨고, 당신들이 미국에 계실 때는 호야가 제일 좋아하는 버스 투어를 함께 하셨다. 아침 공부를 마치고 점심 도시락을 싸 드리면, 그 도시락을 가지고 호야와 할배는 MTS 티켓 한 장을 들고 샌디에고 곳곳을 버스 타고 다니셨다. 이 기억은 호야와 할배만이 가진 아주 특별한 경험일 것이다.


다음 주면 호야는 21살이 된다. 호야를 키우는 동안, 두 분은 단 한 번도 호야에 대해 타박을 하신 적이 없다. 어찌 두 분 마음속에 호야에 대한 안타까움이 없었으랴. 그럼에도 단 한 번도 그 마음을 내비치신 적이 없다. 말로 걱정하는 대신 행동으로 우리를 돕고 싶어 하셨다.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두 분께 역할을 드렸더니, 예상했던 이상으로 열과 성의를 다 해 주셨다. 우리 아이들과 조카들은 이렇게 조부모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운 좋은 아이들이다.


이 글은 바로 지난 달, 결혼 50주년을 맞은 시부모님께 바치는 감사의 글이다.

두 분의 50년 중 20년을 옆에서 함께 했다.

옆에서 본 두 분은 정말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 그 자체이다. 젊어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셨고, 은퇴하시고는 하루 하루를 두 분이 즐기신다. 함께 여행도 가시고, 영호관, 콘서트나 클래식 공연장, 그리고 미술관에도 가신다. 미국에 있는 너희들에게 우리가 아프면 부담이 된다며, 매일 빠지지 않고 아파트 헬스장에 두 분이 함께 손잡고 가신다. 젊은 우리 부부 못지않게 열심히 사시는 모습이 항상 존경스럽고, AI로 세상이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데에도 뒤떨어지지 않으려 끊임없이 공부하는 모습 또한 감탄스럽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우리 시부모님처럼 늙고 싶다.


비록 결혼하고 1년 후 미국으로 오면서 많은 시간을 두 분과 함께 보내지는 못했지만, 함께 보낸 시간의 밀도로 따지면 못지않다고 자부할 수 있다. 호야가 유치원에서 쫓겨날 때마다 우리 부부와 아이에게 들어오라며 학생 부부였던 우리에게 비행기 티켓을 보내는 등, 힘들 때마다 위안처가 되어 주셨고, 방학 때마다 손주들에게 최선을 다 하는 두 분의 모습에 감탄한 적이 많다. 우리 아이들 뿐 아니라 다른 손주들에 대한 사랑도 엄청나신 두 분이다. 두 분에게는 ‘아픈 손가락‘일 수도 있는 호야에 대한 사랑과 지지는 감히 부모인 우리조차도 따라갈 수가 없다.


아버님, 어머님. 감사합니다.

저희도 아버님, 어머님 같은 할매, 할배가 되겠습니다!


2026년 1월 26일

E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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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친정은 예나 지금이나 나에게 가장 편한 안식처이다. 친정에서 우선순위는 ‘나‘임을 항상 깨닫게 해 주신다. 다만, 이 글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호야’이기에 친정에 대해 길게 쓰지는 않았다. 만약 ’우리 딸‘의 관점에서 글을 쓴다면 친정이 더 많이 언급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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