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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인물C Jun 14. 2021

오늘, 아빠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과연 나는 얼마나 남았을까

오늘, 아빠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그 유명한 카뮈 《이방인》의 첫 문장이 고작 주어만 바뀐 형태로 21년 2월 21일 나에게 몰아닥쳤다. (그 와중에 날짜는 왜 이리 가지런할까)


아버지의 임종을 눈 앞에서 지켜봤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사람의 목숨이 꺼지는 것을 눈 앞에서 본 것은 처음이라 제대로 본 것이 맞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아기가 처음 태어나면 배로 복식 호흡을 하다가 크면서 점차 가슴으로 숨을 쉬고 나이가 들어 임종 직전에는 목으로만 아주 얕은 숨을 쉰다. '목'숨이 끊겼다는 것은 말 그대로 '목'에서 나오는 가늘고 얕은 숨조차 끊겼다는 말이다. 즉, 생명이 다한 것이다.


해외 파견 근무 중인 아들이 코로나19 때문에 한국에서 자가 격리 2주, 복귀해서 시설 격리 2주가 힘들까봐 그리고 만약 이번에 다행히 별 일이 없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 불상사가 생겨서 장례를 치르러 한국으로 다시 와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아들의 회사 생활에 지장이 있을까봐, 속으로 당신 죽을 날까지 마음 속으로 정해놓고 나를 손꼽아 기다리던 아버지였다. 그리고 정말로 한국에서의 2주 간의 자가격리가 끝나고 내가 병원으로 찾아가니 고작 며칠 만에 기다렸다는 듯이 훌훌 털고 가버리셨다.


내게는 이런 아버지가 있었는데 스스로는 이제 아버지에게 거의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는 착각이 아버지의 빈자리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부재는 찾아오신 조문객들과 맞절을 하며 무릎에 닿는 빈소의 딱딱한 바닥처럼 점점 현실로 만져졌다. 힘겹게 장례를 치르고 슬픔 속에 온전히 빠져있는 엄마를 혼자 두고 다시 부임지로 복귀해야만 하는 월급쟁이의 삶은 차치하더라도 이미 내 삶은 전과는 같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54년생으로 고작 한국 나이 68살, 만으로 따지면 올해 생신도 못 넘기셨으니 만 66세에 가신 셈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유전자의 힘은 대단히 무섭다. 별 사고가 없다는 전제 하에 나 역시 비슷한 나이, 조금 더 산다고 쳐도 70살 전후로 약 50% 내외의 확률로 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결국 나의 죽음을 떠올린 건 너무 현실적인 것이었을까?


인생의 여러 변곡점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에 수반되는 수많은 감상과 생각 중에서 그나마 누군가에게 이야기할만한 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Time is running out' (Feat. Muse)이라는 사실이었다. 사실 죽음은 늘 주위에 있는데 꼭 이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준다. 만약 한 1년 정도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면 아마도 당장 회사부터 때려치웠겠지만 그래도 30년 정도는 남아있다고 생각하니 입에 풀칠은 해야 하니 그냥 다니는 게 나았다.



그래서 나름의 버킷 리스트를 적어보았다.

개인적인 소소한 것들이라 굳이 다 쓸 필요는 없고, 두 가지만 꼽아본다.


우선 우리 아버지가 나한테 했던 것처럼, 나 역시 하나 밖에 없는 딸내미에게 부끄러운 아빠가 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가 무슨 일을 했으며 무엇을 좋아했고 너를 얼만큼 사랑했는지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다. 돌아가시고 나니 아버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같은 소소한 흔적이 몹시 그리운데 그런 게 없어서 더욱 그렇다.


원래 전부터 끄적거리는 건 좋아했지만 늘 짧은 호흡의 토막글에 불과했고 이번엔 조금 더 결을 다르게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뭔가를 쓰는 것은 원래 좋아하던 것을 조금 본격적으로 해보겠다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키보드만 두드리다 보면 올 수도 있는 육체와 정신의 밸붕을 막기위해 내가 엄청 못 하는데 예전부터 잘하고 싶던 것을 해보기로 했다.


그거슨 바로 오래 달리기, 학교 다닐 때부터 단거리도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균 이상 했다치면 1,500미터 이상의 장거리는 오지게 못 달렸다. 말하는 것도 부끄럽지만 하위 90% 정도? 왜 그렇게 못 달렸는지, 다른 거에 있어서는 스스로 진정으로 한심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오래 달리기는 정말 노답이었다. 그래서 올림픽에서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선수들이 수두룩하지만 그 중에서도 마라톤 선수들을 진심으로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보았었다. 저건 인간이 아니야.


그래서 풀 코스까지는 모르겠지만 하프까지는 도전해보고 싶은 미친 생각을 해봤다. 2킬로도 제대로 못 뛰던 인간이 20킬로를 뛰어보겠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무척 깜찍하다. 정 안되면 10킬로라도 뛰지.


에라이, 될 대로 되라지- 어차피 인생 두 번 사는 것도 아닌데. Qué será, ser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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