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의 콩트 (8)

노숙자

by 최병석

홀로씨는 집에 있는 날이 많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60여 년간 입고 있던 직장인이라는 옷을 최근에 벗어버리고 나니 당최 발가벗은 몸인 것처럼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다. 아직 사지가 멀쩡하고 마음도 청춘인데 규정상 이제 겨우 꽉 맞아 그럴싸했던 옷을 벗으라 하니 어쩌겠는가? 몸담았던 직장문을 벗어나면서 정갈하게 꼭 맞았던 옷을 자리에 남겨두고는 안녕을 고했다. 그리고는 단지 일에서만 멀어질 뿐 회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일에서 떨어진 마음은 회사를 향한 발걸음조차 용납하기를 거부했다. 웬일인지 회사라는 단어는 발가벗은 마음에 대한 스캔을 한바탕 완료해 놓고는 멀찌감치 떨어져 상황을 살피고 있는 하이에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죽은 듯 조용해지기로 하였다. 그저 일을 내려놓고 편안한 심경으로 두 다리 쭉 펴고 집에서 요양 중인 걸로 그렇게 보여지는 걸로 컨셉을 잡았다. 그러자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그리고 한동안 회사와 별개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거래처의 사람들과의 인연 끊기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이제 그마저 끊기면 주변은 가족들 뿐이다. 가족들은 다시 말해 아내와 자식들 뿐인데 그마저 서먹하다. 결혼 후 죽자 사자 먹고살기 위해 밤낮을 안 가리고 뛰어다니다 보니 아이들과의 유대감이 멀어진 거다. 바쁘다는 핑계로 돈독해질 찬스마저 무시해 버리기 일쑤였는데 이제 와서 한가해졌으니 사라진 유대감을 되돌려 달라고 안달해 봐야 헛짓거리다. 집안에서 우뚝 서있을 가장의 위치가 주저앉은 느낌이다. 이제 집안에서 가장 힘이 있는 위치는 아내가 차지해 버렸다. 아내의 한마디는 굶주림과 문제해결의 단초로 작용되기 때문에 그도

아이들도 무조건적인 수용이다. 홀로씨가 집에서 빈둥거린 지 오늘로써 꼭 석 달 째다. 오늘도 아내의 눈치를 보며 부시럭대는 중에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거래처의 백사장이 올만에 전화를 주었는데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빈둥대고 있다고 하니 마침 지나가는 길인데 함께 바람이라도 쐬자며 데이트를 요청한다.


"아이쿠 나이사님! 회사에서 그만두셨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네요 저랑 같이 바람 쐬러 가시죠, 식사도 하실 겸"


"아니 시간이 되시겠어요? 저야 시간이 되지만..."


홀로씨는 올만에 찾아온 황금 같은 찬스를 냅다 부여잡는다.

물론 업무 중에 입었던 정갈한 복장이 아닌 새롭게 부여된 다소 헐렁한 <백수복>을 입은 채로 백사장의 차를 기다렸다.


오랜만의 외출이다. 그것도 자기차로 어딘가를 향하는 게 아니고 거래처의 사장을 통한 대접의 성격이다. 그래서 흥미롭고 살짝 가슴도 콩닥거린다. 이렇게 가슴이 콩닥거린 지가 얼마만인가? 마치 첫사랑을 만났을 때의 기분이다. 둘은 차를 타고 대략 한 시간 반정도의 거리를 달려

제법 분위기가 있는 갈빗집에 당도하였다.


"나이사님 여기 괜찮으실까요? 너무 복잡하지도 않고 음식맛도 나쁘지 않은 듯해서 모셨습니다. 어떠세요?"


"오호 아주 괜찮네요! 분위기도 좋고..."


맥주 한 잔정도의 반주에 부드러운 갈빗살을 뜯어가며 이런저런 옛이야기의 살점을 권커니 잣 커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어지는데 갑자기 백사장의 핸드폰에서 불이 나기 시작한다. 무언가 일이 터진 게 분명하다. 대화 중에 자리를 비우고 전화통화하러 나가는 빈도수가 늘더니 급기야 회사엘 가봐야겠다고 일어선다.


"아이고 당연히 가보셔야죠! 그럼요, 암요"


가봐야겠다는 말에 살짝 아쉽기도 하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그리고 가능하면 자기 때문에 피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아, 그리고 나는 집까지 갈 필요가 없고 중간에, 그렇지 거기 그 전철역 앞에 내려주고 가요"말해 버렸다.


"아이고 그러셔도 될까요? 그럼 그렇게 해드릴게요"


"이사님! 올만에 뵈었는데 이거 실례를 끼쳐 송구합니다"


백사장이 정말 급했나 보다. 홀로씨를 전철역 앞에 떨궈놓고 황급히 가버렸다. 떠나는 백사장을 아쉬움과 흐뭇함으로 보내고 나니 요상스럽게 그의 마음이 착잡하다. 마음을 다 잡고 이제 집으로 가야 한다. 전철을 타기 위해 입구에 당도한 그의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그의 몸 어디에도 핸드폰이 없다. 급하게 서두르다 보니 백사장의 차에 핸드폰을 두고 내렸다. 큰일이다. 백사장에게 전화해야 하는데 전화번호가 떠오르지 않는다. 번호가 안 떠오르면 돋보기를 누르고 백사장이라고 글자만 누르면 나오는 번호였기에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금방까지도 통화한 내역이 있기에 핸드폰만 있다면 통화내역을 뒤지면 1초도 안 걸려 통화가 가능한데 그 핸드폰이 없는 것이다. '아! 맞다 그럼 내 폰에다 전화하면 되겠다'그런데 전철역 내부를 몇 번이고 뒤져봐도 전화를 걸 데가 없다. 결국 지나는 행인에게 부탁해야 하는데 요즘 하도 남의 핸드폰에 나쁜 짓을 해대는 사람들이 많아져 그런지 선뜻 핸드폰을 내주는 사람이 없다. 30분 이상을 <핸드폰구걸자>로 모습을 바꿔 헤매다가 어렵게 전화를 빌렸는데 통화가 안된다. 생각해 보니 식사 중에 대화에 집중하던 버릇으로 핸드폰을 매너모드로 바꿔놓았던 것이었다. 벨이 안 울리니 뒷좌석에 놓여진 핸드폰에 관심을 둘 일이 없는 것이었다. 난감했다.

통화가 안되니 빌린 전화는 이제 돌려줘야 한다. 그러자니 모처럼 얻은 기회를 그냥 날려버리기가 아깝다. 그런데 다른 번호라도 누르고 싶은데 단축번호 외엔 생각나는 번호가 없다.


아내는 0번, 큰 애는 1번, 작은 애는 2번, 누이는 3번...

으아아.. 돌겠다. 그는 지금 무일푼의 무연고자 다시 말하면

노숙자로 또 한 번 옷을 갈아입은 것이었다.


성이 나가요 이름이 홀로씨 <나홀로>씨는 별거 아닌 핸드폰번호 몇 개의 기억을 더듬기 귀찮아 단축번호 속에 숨겨둔 채 노숙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대체 그 번호가 왜 생각에서 빠져나간 것일까?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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