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의 콩트 (13)

수다짝꿍

by 최병석

머나 씨는 요즘 잦은 잊어버림 때문에 속상하다. 분명 잊어버리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고 그 기억을 어딘가에 모셔 두었건만 정작 찾으려 할 그때는 머리가 하얘지며 깨끗하게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다. 머나 씨는 누구보다 좋았던 기억력을 자랑하고 다녔었다. 그 잊어버리는 순간들이 나이 먹어 붙잡고 있던 일들을 손에서 놓아버린 여파가 있는 게 아닐까 염려가 되었고 불안이 엄습해 왔다. 그러던 머나 씨가 동네 주민센터에서 기획한 강좌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수강신청이 이 잊어버림의 염려를 잠재워 줄 수도 있을까 하여 등록까지 하게 되었다. 오픈강좌를 살펴보다가 그녀가 꼭 해보고 싶었던 문화강좌가 눈에 들어왔던 거였다. <나도 유화

그려보기>였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에 소질이 있어 각종 미술대회에 나가 상장들을 휩쓸고 다녔었지만 집안형편이 어려워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일찌감치 접었었던 그녀였다. 해보고 싶었던 그림, 하물며 유화라니... 게다가 멈춘 것 같았던 두뇌회전의 방편이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의 계기가 되었다. 갑자기 그녀가 바빠졌다. 일단의 유화를 그리기 위해 그림붓과 유화용 물감, 캔버스를 올려놓을 이젤 등을 살펴보러 동분서주했다.


드디어 첫 강의 시간이다. 담당교수님도 여자분이시고 대부분의 수강생들도 머나 씨와 동갑이거나 비슷한 또래들이다. 준비물을 사야 한다. 다행히 엊그제 봐 두었던 문구점에 들리면 되었다. 오늘 첫 시간이라 이런저런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나와보니 같은 아파트단지 안에 살고 있는 친구도 있었다. 머나 씨가 다가가 친한 척 말을 걸다 보니 모처럼 동네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올만에 이웃사촌을 만난 느낌을 포착해서인지 감춰두었던 수다가 봇물처럼 쏟아지고 가능하면 입안의 높은 천장과 밀접하게 붙어 있어야겠다는 굳은 결심도 소리소문 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일까? 첫 번째 수업이 끝이 나고 모두들 집으로 향하는데 머나 씨는 그저 잠깐 인사를 나누었을 뿐인 그 친구와 헤어지기 아쉽다.


"저으기 미나 씨! 우리 요 앞 카페에서 라떼 한 잔 하다 갈래요?"

"아, 안 바쁘세요? 음 그럴까요?"


둘은 뭐가 그리 좋은지 할 말이 많았고 모처럼 유쾌했다. 그렇게 수다를 떨다가는 갑자기 머나 씨가 놀란 눈으로 시계를 보며


"아흐 어쩌죠?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왜요? 뭔 약속이라도 있었나 봐요?"


다른 게 아니라 지금 이 시간이면 손주 놈을 데리러 가야 할 시간이었던 것이다.


"아휴, 요즘 자꾸 깜박하는 일들이 넘 많아서 큰일이에요"

머나 씨는 서둘러 유치원에 전화를 넣은 후 문을 나서는 미나 씨에게 한마디 한다.


"미나 씨! 조심히 가유 그리고 이따가 전화 할께요"


여태 그렇게 수다를 떨었건만 못다 한 얘기는 전화로 하겠다며 유치원으로 향하는 머나 씨였다. 서둘러 도착한 유치원에는 정문 앞이 한산한 게 아이들을 픽업할 엄마나 아빠들이 한바탕 다녀간 이후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머나 씨가 정문을 통과하고 유치원 내부로 들어서니 기다렸던 손주 놈이 할머니를 알아채고는 달려와 안긴다. 머나 씨는 차문을 열어 손주 놈을 태우고 선생님과 인사를 나눈 후 차로 돌아왔다. 때마침 울리는 전화벨소리! 머나 씨가 반갑게 전화를 받는다.


"어머나 미나 씨! 잘 들어갔어요? 나는 이제 막 울 손주 데리고 나왔어요 딱 맞춰 전화를 하셨네요 참, 그건 그렇고..."


아이들 픽업시간대가 지나서인지 주변도로는 한산했고 그래서인지 머나 씨는 미나 씨와의 통화가 끝이 나기도 전에 집 근처에 당도하였다.


"어맛, 미나 씨! 우리 벌써 집에 다 왔나 봐, 집에 올라가서 내 전화 다시 할께요"


"자, 하빈아! 집에 가자..."

"하빈아! 뭐 해 집에 가야지?"


대답이 없다. 룸밀러 안에 손주 놈이 안 보인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뒷좌석을 살폈다. 하빈이 가 없다. 가방과 준비물은 덩그러니 뒷좌석에 놓여있는데 손주 놈만 안 보인다. 큰일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하빈이는 할머니가 선생님과 인사하러 간 사이 가방과 준비물을 차 안에 내려둔 채 화장실에 간 거였다. 할머니가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차는 출발했고 하빈이는 유치원에서 할머니가 안 보여 울고 있었고 선생님이 할머니한테 수차례 전화를 넣었지만 올만에 만난 <영혼의 수다짝꿍>과의 기나긴 통화 때문에 할머니 혼자 집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성이 엄가요 이름이 머나 씨 <엄머나>씨로 불리는 할머니는 눈앞이 캄캄해진 상태로 부랴부랴 유치원으로 또다시 달려가야 할 판이었다. 엄머나! 이를 어째?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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