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아이씨
가찬씨는 모처럼 시간을 낼 수 있게 되었다. 경기가 어렵다고 아우성이고 먹고 살려니 할 일들이 없다고 난리인데 가찬씨는 불행 중 다행으로 일이 차고 넘쳤다. 밀려드는 주문에 며칠이고 밤도 새웠다. 회사일 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갔다. 일도 일이지만 너무나 버겁다. 몸에 이상징후도 나타난다. 몇 년 만에 쌍코피다. 하도 어려우니 정부에서도 민생회복을 위해 지원금까지 주겠다고 나선 참이라 우리는 그나마 남들과 다르게 일이 넘쳐나 코피까지 흘릴 정도라는 자랑조차 목구멍 너머로 삼켜야 하는 분위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회사 내 직원들 모두가 다 헉헉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근무시간이 정상범주를 벗어나 야근에 특근까지 벌써 한 달째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가찬씨가 나섰다. 최종 바이어에게 양해를 구하고 3일을 벌었다. 그 3일 동안 비상인원만 남기고 회사직원을 대상으로 특별휴가와 비용을 지불했다. 물론 가찬씨도 쉼을 갖기로 하였다. 한 달 중 거의 보름 이상을 회사에서 보내다 보니 아내와 아이들한테 면목이 없다. 가찬씨가 휴가계획을 세우기로 하였다.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검색하고 스케줄을 세우고 있는데 경리담당 최 과장이 결재차 사무실에 들렀다가 한마디 한다.
"에이 사장님! 뭘 그리 어렵게 하고 계세요?" 한다.
"에? 그게 무슨 소리여?"
"요즘은 휴가계획도 전부 AI로 끝내버려요"
"이번 휴가를 어떻게 보내실 것인지 정하시고 일정과 지역을
입력해 놓고 기다리면 얘가 스케줄표까지 쫘악 짜서 제시해
준다고요"
문밖을 나가려던 최 과장이 컴퓨터에 AI앱을 깔더니 순식간에 가상의 휴가계획을 의뢰하고 답변까지 얻어내고야 만다.
"오호! 이렇게 신박한 방법이... 이여 최 과장 고마워"
가찬씨는 이번휴가를 멀리 나가지 않고 아이들과 맛집투어를 하며 호캉스를 즐길 생각이다.
"내일부터 2박 3일로 호캉스를 가려고 하는데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맛집을 투어 하며 근사한 호텔에서 휴식을 즐길 일정을 제시해줘 봐"
서울의 한강변을 중심으로 맛집과 비용한도, 숙박까지 상한선을 설정하고 엔터를 누르고 기다리니 깔끔한 휴가계획안을 1에서 3개까지 제시해 준다. 가찬씨가 기분 좋게 집으로 향했다.
"자갸! 우리 낼 당장 휴가야!"
"여기 세 가지 계획이 있는데 골라봐"
아이들과 머리를 맞대고 AI가 짜준 계획안을 살펴본다.
"우와 울 아빠가 이렇게 세밀한 계획안을? 아빠가 대문자 J였었나?"
다소 늦은 저녁에 휴가출발에 대한 기대감이 집구석을 날아다닌다.
아침부터 분주하다. AI가 짜준 계획안 셋 중에 한식 맛집에 포커스를 맞춘 두 번째 안의 시간표에 따라 식구들이 집을 나선다. AI스케줄표에는 집을 나서기 전 해야 할 일들도 코멘트로 남겨주었다.
"자갸! 창문 닫았지? 가스도 잠그고? 모두 집에 없을 거니 전원도 OFF로 놓으래! 자 신발정리하고 모두 고고씽"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쌍코피의 출현으로 급작스레 떠나게 된 가족여행은 치밀하고 세심한 AI의 계획표에 의거해 맛있고 가벼우며 여유롭게 마무리되었다.
"자갸! 이번 여행 어땠어? "
"아빠! 이번 계획 아주 자연스럽고 좋았어요"
가찬씨는 뿌듯했다. 왜 모두들 AI를 얘기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가찬씨가 지하주차장에 차를 파킹시키고 현관문을 열었다.
맙소사! 먼저 짐을 싸들고 올라간 아내와 아이들이 바쁘다.
주방과 거실바닥에 물이 흥건하다. 휴가시작 전 메인전원을
OFF로 해놓은 게 화근이었다. 아무도 없기는 해도 냉장고는
일을 했어야 했다. 녹아버린 얼음과 냉동식품에서 흘러나온
물들이 집구석을 잡아먹고 있었다.
성이 기가요 이름이 가찬씨 <기가 찬>씨가 이렇게 휴가의 끝을 기가 찬 채로 마무리하고 있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