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잠
루리 씨는 최근에 이사를 하였다. 변두리의 다세대 주택에서 오랜 기간 살다 보니 교통 문제나 장보기 같은 사소한 귀차니즘이 살고 있는 정착지에 대한 애정을 덥석 덥석 물어가기 일쑤였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였다. 몇십 년 만의 폭염이 거동하는 것 자체에 브레이크를 걸고 못 나가게 훼방을 놓고 있는 와중. 모처럼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온갖 짜증과 범벅이 된 끈적임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 혼자 툭 불거져서 번쩍번쩍하고 으리으리한 고급아파트로 빙의되어 큰 입을 벌리고 그나마 남아있는 쥐꼬리만 한 애정마저 덥석 물어가 버리는 식이었다. 또 다른 예로 그렇게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장을 보고 겨우 도착했는데 차를 댈 곳이 마땅치 않아 집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곳에 주차를 하며 그나마 남으려고 했던 애정까지 내팽개치듯 버려둔 채 집으로 돌아오곤 했던 식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한 발자국씩 떨어져 살고 있는 집을 바라볼 때마다 가지고 있던 애정들을 빼앗기다 보니 이사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온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자 그러자니 눈을 감았다가 뜨노라면 보이는 건 온통 괜찮은 아파트, 아파트뿐이다. 물론 그런 생각은 결론적으론 엄두도 못 낼 가격 때문에 그저 빼앗긴 애정만이 아까울 뿐이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기회가 왔다.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이 해외지사장 발령으로 국제이사를 하게 되었고 몇 년 후에 다시 복귀할 때까지 싯가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자기들 아파트로 들어와 살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거였다. 물론 깨끗하게 잘 관리하며 살겠다는 확약을 받고 난 다음이긴 하였지만 여하튼 봉 잡았다.
예전 집에 대한 빼앗긴 애정은 돌아올 생각조차 없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또 다른 애정이 샘물처럼 솟아 나오고 있는 중이다.
새로 이사 온 아파트는 졸졸 솟아나는 애정에 기름 같은 기폭제를 좋은 환경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여서 그 크기를 더해 주었다. 장보기를 끝내고 집으로 오는 시간은 이제 걱정과 염려를 내려놔도 좋다. 비가 오고 눈이 내려도 좋다. 지하주차장으로 연결된 엘베가 웃으며 기꺼이 반겨준다. 어디 그뿐이랴? 멋들어진 조경과 단지 내에 조성된 저수지에서는 어여쁜 물고기들도 삼삼오오 여유를 즐기고 있다. 이제 막 올라온 애정에도 부쩍부쩍 살이 오르고 있음이 느껴진다.
어라?살이 오른 애정전선에 갑자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예민한 성격에 특히나 불면증에 시달리는 그녀에게 복병으로 찾아온 훼방꾼이 하나 있는데 그건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단지내 저수지의 개구리소리였다. 이제 막 여름 줄로 들어선 탓에 짝들을 찾아 대느라 그런지 개굴거리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초저녁은 그나마 TV며 주변의 소음 들에 가려서 잘 들리지 않는데 하필 그녀가 잠을 자려는 그 시간에 무지 막지 하게 울어댄다.
"개굴개굴개굴... 개개굴개굴.. 개개개구울울"
그녀의 화가 얹힐 곳을 찾지 못하고 천지사방을 떠돈다.
'흐이구 미치겠구마잉'
이리저리 도망간 잠을 찾으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다름이 아니라 아파트 단지 내의 조경 중 저수지에서의 풀벌레소리나 개구리울음소리는 십중팔구 <관리사무소의 작품> 일 것이라는 추론이다. 즉 다시 말해서 인공으로 조성된 저수지에서 그런 소리가 날 까닭이 없어서 정서적 분위기를 위해 <녹음된 소리>를 송출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옳거니! 어쩐지 들려오는 소리가 너무 뻔하더라니..."
그녀가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관리실이죠? 여기 101동 25호인데요, 이제 제발 저 풀벌레소리, 개구리소리 좀 꺼 주실래요?"
"제가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요"
"네? 무 무슨 말씀이시죠? 저희는 그런 소리를 내 보낸 적이 없고요 저 소리는 자연의 소리인데요?"
"네? 이거 왜 이러세요... 다 알고 드리는 말씀인데..."
"아니 정 정말이고 진짜입니다."
"ㅡ ㅡ ㅡ"
성이 이가요 이름이 루리 씨 <이루리>씨는 오늘도 깊은 잠을 이루기가 어렵게 생겼다. 그 노무 깊고 달콤한 잠은 언제쯤 이룰 수 있으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