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에서 실천으로, 라즈기르로 가는 길

라즈기르(Rajgir)

by 영 Young

나란다에서 떠나는 발걸음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지혜가 꽃피웠던 붉은 벽돌의 도시, 부처님과 수많은 스승들이 진리를 전하려 애썼던 그곳. 나는 조용히 그 자리를 뒤로하고, 또 하나의 성지를 향해 차에 올랐다.


그 목적지는 라즈기르(Rajgir). 고대에는 ‘라자그리하(Rajagriha)’, 즉 ‘왕의 집’이라 불렸던 곳으로, 마가다국의 수도이자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시며 설법을 펼치신 땅이다. 나란다에서 불과 15km 남짓 떨어진 거리, 차량으로는 30~40분이면 닿지만, 풍경의 깊이는 그보다 훨씬 더 넓고 깊다.


창밖으로 펼쳐진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녹음이 짙은 계곡이 그 사이를 감싸 안았다. 라즈기르에 가까워질수록 낮은 산들이 이어지고, 마을마다 오래된 삶의 흔적이 고요하게 남아 있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은 마치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순례자의 마음 같았다.

먼 곳에서 영축산(Griddhakuta, Vulture’s Peak) 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처님께서 수많은 경전을 설한 곳, (법화경), (금강경), (무량수경)도 이 산에서 설해졌다고 전해진다. 산세는 그리 높지 않지만, 그 안에 깃든 기운은 깊고 맑았다.


라즈기르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죽림정사(Venuvana)'였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께 헌정한 최초의 사찰로, 대나무 숲과 연못이 어우러진 고요한 명상처다. 연못에서는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고, 몇몇 순례자들이 벤치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나도 한 자리에 앉아, 대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지혜는 배움에서 시작되지만, 진짜 수행은 일상에서 시작된다.” 부처님도 이 정사에서 수많은 밤을 보내셨다. 제자들과 함께 걷고, 먹고, 말하며 가르침을 삶 속에 녹여내셨으리라.

그다음 찾은 곳은 칠엽굴(Saptaparni Cave). 구왕사성 북서쪽 언덕에 자리한 이 굴은, 마치 일곱 개의 나뭇잎이 펼쳐진 것 같아 그렇게 불린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가섭존자는 부처님의 말씀들이 잘못 전해질 것을 우려해 아라한 500명을 이곳에 모았다. 경의 초안자는 부처님 곁을 시봉 하던 아난존자였다. 그는 부처님의 말씀을 한 구절씩 읊었고, 장로들은 따라 외우고 그것을 기록했다. 그렇게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경전의 씨앗이 이곳에서 뿌려졌다고 한다.

영축산,부처님 법 설하신 자리

이제 영축산으로 향한다. 라즈기르 동쪽 언덕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 350여 미터 정도다. 산 아래에서 약 30분가량 완만한 오르막길을 걸었다. 능선에서 내려다보니 산 전체의 형상이 마치 독수리 같아 ‘독수리 봉우리’라는 이름이 붙여졌음을 실감했다.


부처님께서 성도 이후 자주 머무르며 설법을 펼친 이 산에는 지금도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여 법회를 연다. 정상에는 지금 정자의 흔적인 돌바닥만 남아 있었고, 거센 겨울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한국과 미얀마, 중국에서 온 단체 순례단들은 독경을 합장하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나 역시 바람 속에서, 돌바닥에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눈을 감으니 그 옛날 부처님의 향기가 스며들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독경이 어우러져 더욱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 순간, 마음이 정지되는 듯했다. 지혜는 말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생각이 아니라 호흡 속에서 피어난다는 것. 나를 위한 길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길이 수행임을 온몸으로 느꼈다. 정성을 다해 삼배를 올렸다.

영축산 옆 언덕 위에는 일본이 세운 산티 스투파가 눈에 띈다. 순백색 티베트식 탑으로, 정갈하고 웅장한 부처님상이 순례자들을 맞이한다. 이곳에서도 짧게 기도를 올리고 사진을 한 장 남겼다.

하산 길, 마을 쪽으로 내려오자 온천지대가 펼쳐졌다. 라즈기르는 불교뿐 아니라 힌두교, 자이나교 모두에게 성지이자 요양지로 알려져 있다. 뜨거운 온천물에 발을 담근 현지인들이 피로를 푸는 소박한 모습이 참 인상 깊었다. 삶은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따뜻할 수 있다는 것을, 라즈기르는 조용히 가르쳐주고 있었다.


산 아래 언덕에는 빔비사라 왕의 감옥터도 남아 있다. 그의 아들 아자타사투에 의해 유폐되었지만, 그는 매일 산을 바라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겼다고 한다. 그 작은 감옥터에는 한 인간의 믿음과 갈망이 고요히 남아 있었다.

그동안의 여정을 되돌아본다. 수행이란 결국 걷고, 생각하며, 나를 찾는 시간이었다. 해가 지고 어스름이 내려앉은 라즈기르의 거리를 걸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도 이 길을 걸으셨을까.” 그래서 나는 발걸음을 더욱 조심스레 내디뎠다.

깨달음은 특별한 순간에 오지 않는다. 배우고, 생각하고, 살아내고, 걸으면서 서서히 스며드는 것. 라즈기르에서 나는 그것을 배웠다.

그날 밤, 미얀마 절에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마음이 아주 고요해졌다.


[주요 유적지 정리]

죽림정사(Venuvana): 부처님께서 머무르셨던 최초의 사원

영축산(Griddhakuta): 부처님이 여러 경전을 설법한 성산

칠엽굴(Saptaparni Cave): 경전 결집이 이루어진 역사적 장소

빔비사라 왕 감옥터: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려 했던 왕의 믿음

산티 스투파: 일본이 세운 티베트식 불탑

온천지대: 힌두·자이나·불교 공통의 요양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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