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나는 사무실에서 바이어들과 상담 중이었다. 어머니가 위급하다는 연락은 이전에도 여러 번 받았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회의를 계속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급히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아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곧바로 어머니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아내가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어머니 방금 돌아가셨어요. 엄마! 조금만 더 기다리시지…"
나는 어머니의 차가운 이마를 쓰다듬었다.
"엄마, 좋은 데 가세요. 정말 미안해요."
앙상한 가슴 위에 몸을 기댄 채 나는 한동안 일어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타국으로 근무를 나가게 되자, 병원에 가시기보다 나를 따라가겠다고 고집하셨다. 치매와 파킨슨병으로 고생하시면서도 나와 함께하길 원하셨다. 아마도 당신의 마지막을 내 곁에서 맞이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하지만 중동에서의 삶은 어머니에게 쉽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과 뜨거운 기후, 외롭고 낯선 문화는 어머니의 건강에 무리를 주었다. 나는 필리핀 도우미를 붙여 어머니를 돌보게 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후 구한 파키스탄 도우미 엘리는 1년 넘게 어머니를 보살폈다.
어머니는 엘리를 무척 따랐다. 엘리가 휴가로 자리를 비운 동안, 어머니는 매일 그녀를 찾으셨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마치 다시 살아난 듯 밝아지셨다.
그토록 사람이 그리우셨던 걸까.
중동에서의 시간은 어머니와 나의 마지막 추억이 되었다. 현지인 초대를 받아 사막으로 피크닉을 갔던 날이 떠오른다. 넓게 펼쳐진 사막과 낯선 풍경을 보며 어머니는 손자들과 함께 웃으셨다. 더위에 힘들어하시면서도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우셨던 듯했다.
또 한 번은 요트를 타고 섬으로 놀러 갔었다. 어머니는 평소보다 더 멋진 갈색 투피스 정장을 차려입고 기뻐하셨다. 손자들을 안고 사진을 찍으시며, 외국인들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가셨다.
그 모든 순간이 어머니에겐 새로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왜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을까. 어머니의 작은 웃음과 행복을 미처 더 소중히 여기지 못한 나 자신이 후회스러울 뿐이다.
어머니는 내게 '슈퍼우먼'이었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강하게 살아오셨다. 새벽같이 일어나 포도밭과 농장을 돌보셨고, 시장에서 농작물을 팔아 가정을 책임지셨다. 수십 명의 일꾼들을 먹이고, 일의 방향을 이끌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강인함 그 자체였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일하는 것을 사랑의 표현으로 보지 못하고, 단순한 일상처럼 받아들였다. 용돈을 달라며 떼쓰고, 공부는 뒷전인 채 어머니의 말에 짜증을 내던 내가 어머니의 희생을 알았을 리 없다.
어머니는 늘 곁에 계실 거라 믿었다. 어머니의 사랑은 나를 꾸짖지 않았고, 나를 위한 희생을 멈추지 않았다. 그 무조건적인 사랑이 내겐 너무도 익숙했기에 그 진정한 가치를 헤아리지 못했다.
어머니를 캄캄한 비행기 짐칸에 모시고 귀국하던 날, 나는 비현실적인 꿈속을 헤매는 듯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어두운 하늘 아래, 어머니와의 모든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의 사랑은 내가 자라온 모든 순간에 깃들어 있었다. 그 사랑은 내가 가진 삶의 가장 큰 힘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께 단 한 번도 제대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더 자주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고, 더 많은 추억을 쌓지 못했다. 이제야 깨닫는다. 어머니의 사랑이 내 삶을 지탱했던 가장 큰 기둥이었다는 것을.
"엄마,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사랑합니다."
이제는 멀리 하늘나라에 계실 어머니를 떠올리며 나는 다짐한다. 어머니가 내게 보여주셨던 사랑과 희생을 마음 깊이 새기고 살아가겠다고. 당신의 기억을 잊지 않고, 당신의 아들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고.
어머니의 따뜻했던 손길과 미소는 내가 평생 간직할 소중한 추억이자, 삶의 이유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