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하나의 무대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각자의 배역을 부여받는다. 학생으로, 직장에서의 일꾼으로, 가정에서는 부모나 자식으로 살아가며 각자의 무대에서 맡은 역할을 연기한다. 무대는 끊임없이 바뀌지만, 삶이라는 끝없는 무대를 떠날 수 있는 순간은 단 하나뿐이다. 바로 우리의 삶이 끝나는 그 순간이다.
지난 주말, 나의 삶에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무대의 조각들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동기들과 40여 년 만에 대구에서 다시 만났다. 중단되었던 동창 모임을 다시 시작한 건 경명과 덕수의 제안 덕분이었다. 친구들을 보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었지만, 현실에 치여 미뤄왔던 터였다. 그래서 그들의 제안이 더없이 반가웠고, 무척 고마웠다.
그날 밤,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눴다. 교사, 교수, 사업가, 공직자, 농원 대표, 신문지국 대표, 수출기관 등 각자 자신만의 무대에서 맡은 역할을 묵묵히 완수하며 살아온 친구들이었다.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그들은 때로는 넘어지고 흔들리기도 했지만, 끝내 자신의 배역을 충실히 해낸 사람들이었다.
특히 놀라웠던 점은 은퇴 후에도 그들이 자신만의 일을 찾아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승호, 영재, 경명, 문재는 각각의 무대에서 여전히 불꽃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문재는 대기업 임원으로 퇴직한 후 5톤 트럭을 직접 몰며 1500평의 과수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농장에서 보내는 하루는 이전과 다르지만, 그만큼 보람이 크다”는 그의 말에서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열정이 묻어났다.
산림직에서 퇴직 후 사업에서 성공한 진탁은 여전히 특유의 유머로 모두를 웃게 했다. 덕수와 화수는 교사와 교수 출신으로 품격 있는 스승의 모습을 간직하며 노년의 멋을 발산하고 있었다. 승호는 꿀벌 농원을 운영하며 꿀처럼 달콤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며 웃음 지었다. 중소기업
운영으로 성공한 영재는 기업인의 중후한 자태가 묻어났다.
그들의 이야기는 고단함 속에서도 찢기고 깨진 자리마저 아름답게 채운 흔적들이 보였다. 삶의 무대에서 누구도 완벽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자신의 배역을 완수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는 점이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학창 시절의 추억을 꺼내놓으며 웃음을 나눴다. 한약방을 했던 우리 집과 포도밭에서 놀았던 기억, 문재와 덕수의 하숙집에 신세를 졌던 일들, 경명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까지. 이야기 하나하나가 우리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이번 모임에서 경명은 큰 역할을 했다. 그는 품격 있는 식당과 숙소를 준비하며 친구들을 초대했다. 알고 보니 그의 딸이 모든 예약을 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딸이 없는 나로서는 조금 부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경명의 따뜻한 배려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모임 비용은 경명이 전부 부담했다. 우리가 십시일반 나누자고 했지만, 그는 막내아들의 결혼식 축하에 대한 보답이라며 우리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싱싱한 해산물 요리와 소주, 맥주가 더해지며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다. 특히 진탁이 만들어준 칵테일은 내 기분을 한껏 높여주었다.
밤에는 수성못을 산책하며 차가운 바람을 맞았다. 화려한 불빛이 물에 반사되어 운치를 더했고, 그 길을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했다. 학창 시절 운동장에서 뛰놀던 추억이 떠올라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쉽게도 덕수의 색소폰 연주는 들을 수 없었지만, 우리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1박 2일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순간들은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갔다.
다음 날, 승호와 나는 차 시간을 기다리며 동성로를 걸었다.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거리에서 우리는 학창 시절의 흔적을 떠올렸다. 따로국밥 한 그릇으로 몸을 녹이며 마지막 대화를 나눴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친구들은 모두 각자의 무대에서 맡은 배역을 훌륭히 완수해 냈다. 이제는 쉬어도 될 나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새로운 배역을 맡으려는 모습이었다. 그런 친구들이 자랑스러웠고, 그들의 열정이 부러웠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무대에서 살아간다. 정치인은 정치를 하고, 기업가는 경영을 하며, 직장인은 맡은 일을 한다. 그 단순한 원리가 세상을 움직인다. 한 사람의 연기는 가정을 바꾸고, 사회를 흔들며, 국가를 지탱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배역은 수시로 바뀐다. 그 배역을 끝까지 완수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본질이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내 곁에는 삶이라는 무대에서 나와 함께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할 소중한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자산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였기에 지금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
삶은 끝나지 않는 연극이다. 우리는 오늘도 각자의 무대 위에 선다. 그리고 매 순간 충실히 연기하며 인생이라는 작품을 완성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