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발산업에서 모아진 시드머니
1960년대,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는 가발이었다. 자원이 부족했던 한국에서 여성들의 머리카락은 귀중한 가발 제조 원료가 되었다. 당시 한국은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제 성장을 절실히 필요로 했고, 우리가 가진 자원은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가발 산업은 단순한 공예품 제작이 아니라, 국가 경제를 떠받치는 중요한 산업 중 하나였다.
가발을 만들기 위해서는 질 좋은 머리카락이 필요했다. 한국 여성들의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은 해외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미국과 유럽에서는 자연스럽고 튼튼한 한국산 가발을 선호했다. 그 덕분에 많은 가발 공장이 생겨났고, 여성 노동자들이 하루 종일 앉아서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엮었다. 이들의 손끝에서 탄생한 가발은 하나의 예술 작품과도 같았다.
당시, 마을을 돌며 머리카락을 수집하는 상인들이 있었다. 긴 머리를 가진 여성들에게 돈을 주고 머리카락을 사들이던 이들은, 마치 오늘날의 고물상처럼 전국을 누비며 머리카락을 모았다. 어린 시절, 엄마와 이모가 길게 기른 머리를 자르고 머리카락 상인에게 건네던 기억이 떠오른다. 긴 머리를 자르며 아쉬운 듯 손끝으로 몇 번이고 매만지던 모습이 생생하다.
머리카락을 판 돈은 가족의 생계를 위한 쌀을 사거나, 자식들의 학비를 대는 데 쓰였다. 가난했던 시절, 단순한 머리카락 한 움큼이 누군가에게는 밥 한 끼가 되고, 학용품 한 세트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는 당시 여성들의 희생과 가족을 향한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한때 케냐에서 머문 적이 있다. 그곳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 세계 인구의 약 25%를 차지하는 아프리카인들은 대부분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머리카락은 가발 제작에 사용할 수 없다. 머리카락이 위로 곧게 자라지 않고, 오히려 두피를 파고들어 상처를 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아프리카 여성들은 머리카락이 살갗을 파고들지 않게 하기 위해 한 올 한 올 다른 머리카락과 이어 매듭을 만들어 땋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땋은 머리는 아프리카 여성들의 독특한 헤어스타일이 되었다. 길게 땋은 머리를 늘어뜨린 그들의 모습은 하나의 문화이자 정체성이기도 하다.
이와 비교하면, 한국 여성들의 매끄럽고 탄력 있는 직모는 가발 제작에 있어 매우 가치 있는 자원이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유전적 특성이 우리가 가발 산업을 성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수집된 머리카락은 가발 공장으로 보내졌고,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이 머리카락을 이용해 가발을 만들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작은 바늘을 사용해 머리카락을 정교하게 엮었다. 어떤 여성들은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가내수공업 형태로 가발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국산 가발은 전 세계로 수출되었다.
가발 산업은 단순한 공예품 제작을 넘어 국가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우리가 가발을 팔아 벌어들인 외화는 공장을 짓고,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는 데 쓰였다. 지금의 대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머리카락 한 올에서 시작된 경제적 기틀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적인 경제 강국이 되었다. 수많은 산업이 발전하고, 우리는 더 이상 가발을 주요 수출품으로 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모든 번영이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발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야 했던 여성들, 하루 종일 손끝이 닳도록 머리카락을 엮었던 노동자들, 가족을 위해 자신의 긴 머리를 아낌없이 내어준 어머니들과 누나들이 있었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풍요가 가능해졌다.
한 올 한 올 엮어진 머리카락처럼, 우리 사회의 발전도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정성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노력을 기억해야 한다. 가끔 거울을 보며 빗질을 할 때마다, 머리카락 한 올 속에 담긴 우리의 역사와 조상들의 노고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 그것이 우리가 그들의 희생에 감사하는 한 가지 방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