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 대우중공업 삼성중공업 대한중기 효성중공업 쌍용중공업 두산중공업 현대양행 등 기계공업분야를 전담취재하던 80년대 말 쯤이었다.
데스크(취재부장)에서 갑자기 철강분야를 맡으라고 주문했다. 철강분야라면 말할 것도 없이 포항제철을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현대제철 인천제철 동국제강 한국제강 등 제철 제강 주물 등의 2차산업도 포함된다. 제철산업은 소재산업으로 기계공업의 가공산업과는 구분된다.
전임자와 대강의 인수인계를 마치고 퇴근하여 귀가했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화가 왔다(당시는 휴대전화가 상용화되지 않았다). 전화를 건 쪽은 포항제철 홍보실장이라 했다. 세계적인 기업이라 역시 정보도 빠르고 행동도 기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부장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아, 예! 기자님~. 내일 포항으로 모실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아침 8시 경주 행 열차표를 끊어 놓았습니다. 서울역에 나오시면 저희 직원이 안내할 것입니다."
"???~ 내일 아침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니요~ 저희 사장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그럼 잘 다녀 오십시요."
번개불에 콩 튀겨 먹는다는 속담이 무색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강요였다.즉시 부장에게 전화하여 취재차 포항제철에 다녀오겠다고 전했다.
다음날 아침 서울역에서 안내직원과 함께 새마을호를 타고 경주역에 내리니 현지 홍보실 직원이 마중나와 있었다. 마음속으로 사장 면담과 현장취재 골자를 준비하고 있는데 어느새 영일만의 제철소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공장건물과 설비까지 그 규모에 압도 당하기에 족했다.
제철산업은 국가기간산업으로서 선진공업화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필수불가결의 존재다. 공업입국의 자부심인 것이다. 미국 영국 독일 일본의 예에서 잘 나타난다.
"사장님의 오전 일정이 빡빡하시답니다. 시간이 나는대로 연락하라 해놨으니 우선 공장부터 돌아보시지요." 홍보실 안내직원의 설명이었다. 시뻘건 쇳물을 토해내는 전로에서부터 압연과정까지 둘러보는데 시간이 꽤 흘렀다.
은근히 짜증이 났다. 일방적으로 기자를 불러놓고 면담시간이 없다니 말이 되는가. 그때였다. 사장님 시간이 10분 쯤 났다며 급히 사장실로 가잔다. 어느새 순한 양이 되어 따라갈수밖에 없었다.
"최형! 반갑습니다. 그동안 기계공업을 맡았었다니까 제철산업의 중요성은 잘 아시겠죠?"
"....?"
"대학에서 정치외교학 전공한 줄로 아는데 어떻게 이공분야를 그리 잘 취재했어요? 앞으로 우리 제철분야에 대해서도 잘 취재해 주세요~."
박태준 사장은 이미 나의 신상정보를 꽤뚫고 있었다. 역시 박정희 대통령의 두둑한 신임을 받을만한 그릇이었다.
"당면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어려움이라기 보다는 우리 제철소에 근무하는 사원들의 자부심을 높이는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거문제 자녀교육문제 여가활용 문제 등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포철은 사원의 자녀를 위해 운영하는 유치원의 교사를 사투리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으로 채용할만큼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었다.
"제철산업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겠지요?"
"대강은요. 제가 기계공업 분야를 취재하다보니까 산업고도화를 위해서는 기계공업의 발전이 필수더군요. 그리고 기계공업의 3대 요소가 소재 열처리 도금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최형은 정치학도 출신인데 기계공학을 전공한 나보다 더 기계산업을 잘 아십니다. 우리나라의 기계공업이 이렇게 빨리 발전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군요.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산업이 발전하려면 그 분야에 똑똑한 전문기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태준 사장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공학도다. 그는 나중에 육군사관학교를 6기로 졸업했으며 박정희 대통령 시절 대한중석 사장을 맡고 있다가 포항제철소 건설을 진두지휘해 단번에 세계 철강강국을 이룩한 장본인이다.
10분간 예정이었던 면담이 30분을 넘어가게 되자 비서진의 독촉메모가 빈번해졌다. 그는 아쉬운 빛을 보이며 "최형! 상경하는대로 바로 유럽출장을 준비해주세요. 제철산업 선진국을 돌아보고 좋은 기사 많이 써주세요. 비용은 우리회사가 부담합니다."
이렇게 해서 느닷없는 유럽출장을 가게 됐으며 일본의 신일본제철을 비롯 독일의 함부르크에 있는 아르셀로미탈 제철소, 영국 포트 탤벗에 있는 사우스 웨일즈 제철소, 프랑스의 지중해제철소, 오스트리아의 푀스트 알피네 제철소를 두루 견학하게 되었다. 이들 나라의 제철산업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고로에서 달구어져 나오는 쇳물을 열연, 압연과정을 거쳐 핫코일로 만들어내는 최신 공정을 설명하고 자랑하는 데 입에 침이 말랐다. 그들은 또한 신흥국인 한국의 제철소와 조강능력, 박태준이라는 철강인에 대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포항제철은 1968년 착공한 이래 1992년 광양제철소의 4기 준공으로 연간 조강 생산능력이 2080만 톤에 이르러 세계 최대 규모의 제철회사에 랭크되어 있다.
영국을 끝으로 귀국하는 날, 공항의 화물야적장에 정돈되어 있는 핫코일에서‘POSCO’라는 레텔을 발견하고 어깨가 으쓱해졌던 기분은 아직도 그대로다. ‘유럽의 제철산업을 둘러보다’라는 제하의 현지 르뽀기사가 제철소와 관련업계의 시선을 집중시켰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