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양통신 26

by 김치호

어느덧 10월입니다


태풍 힌남노의 진로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노심초사하던 때가 엊그저께 같은데요.... 그 9월이 가고 어느덧 10월입니다.


계절은 무심한 듯 유심하여 가을의 감성을 자극하고, 결실을 맺어가는 작물들이 따가운 햇살에 반짝거립니다. 주변의 초목과 산색도 하루가 다르게 가을빛으로 짙어가고 있고요.


이곳에서 맞는 두 번째 가을, 외진 산촌의 고요와 소박한 삶, 그 소소한 일상 속으로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안식과 평화로움이 찾아듭니다.


지난해는 집 짓고 뒷정리하느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으나, 올해 들어서는 나름 이곳의 초목과 그 생태에 빠져드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햇빛의 강약, 공기 속의 물기, 연두에서 초록, 초록에서 황록으로 변해가는 색변(色變), 개화와 결실.... 그리고 야생의 또 다른 축인 짐승과 벌레 곤충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조금씩 이해를 넓혀가는 중이라고 해도 될까요.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한 달 동안의 풍광 변화는 유난히 선명했습니다. 작열하던 태양의 열기가 꺾이면서 초목이 심록(深綠)에서 황록으로 변해갔고, 공기 중의 물기가 줄어들자 하늘이 높아지고 구름은 가벼워졌습니다. 잠자리 날갯짓 분주하고 풀벌레 소리 요란하던 날, 꽃무릇이 피었습니다.


산책길 발걸음 앞에 밤송이가 소담스럽게 떨어져 있습니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알밤의 때깔과 탐스러움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한껏 풍요로워집니다. 인간의 마음을 매혹하는 자연의 넉넉함이자 섭리의 또 다른 모습이지요? 밤은 9월 하순부터 수확이 시작되었고, 10월 말이면 대봉감의 수확이 시작됩니다.


올해는 대봉감이 지난해와 지지난해의 흉작을 보상이라도 하듯 가지가지가 휘어져 부러질 정도로 많이 달렸습니다. 다만 심한 봄가뭄 탓에 발육이 부진했던 데다 한정된 나무 기운을 너무 많은 감들이 나누다 보니 씨알은 예년에 못 미친다고 하는군요. 요즘은 거의 매일 집 주위의 여덟 그루 대봉감나무를 둘러보고 있습니다. 주렁주렁 달려있는 그 풍성한 양태에다 능소화 꽃색을 닮아 몽환적이기까지 한 주홍빛 대봉감을 바라보며 황홀감에 빠집니다.


텃밭의 상황은 별로 좋지 못합니다. 가지와 고추는 아직 그런대로 버티고 있지만 들깨와 토마토는 병을 해서 일찍 마감을 한 상태고요. 8월 말에 씨를 넣은 가을배추와 무는 싹을 고라니가 다 뜯어먹고 얼마 남은 것마저 벌레 먹어 성한 데가 없습니다. 울타리를 하거나 모기장 비슷한 것을 덮어씌워 고라니의 입질을 막고 친환경 액비와 살충제를 뿌리는 이들도 있다지만, 저의 정성이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 못함을 반성할 뿐입니다.


하나 자랑할 만한 일도 있습니다. 봄에 호박구덩이를 여러 개 파고 마을에서 소똥 거름을 얻어다가 구덩이마다 넉넉히 넣은 뒤 씨앗을 넣었는데요. 그 생육이 심히 왕성하여 여름부터 지금까지 잎을 따서 된장국을 끓이기도 하고,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 쌈을 싸 먹기도 했습니다. 풋호박으로는 찌개 끓이고 전을 부치기도 했고요. 며칠 전에는 누렁둥이 호박 3개를 수확했는데, 하나는 지름이 45cm가 넘고 무게가 11kg가 더 나가는 대물(大物)입니다.


안타까운 소식도 있습니다. 집 옆 대밭에 있는 아름드리 왕소나무 두 그루 이야기입니다. 이 소나무와는 아침에 눈 뜨면 창밖을 보며 눈인사 나누고 서로를 확인하는 사이였는데, 한 그루는 지난봄에 재선충으로 생을 마감했고, 나머지 한 그루마저 말라죽어가고 있습니다. 수백 년 동안 갖은 풍상을 견디며 저 언덕을 지켜온 생명이니, 어찌 영(靈)과 기(氣)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가슴 한켠이 허물어지는 듯 허전하고 너무 슬픕니다.


오늘따라 넋두리가 길었습니다. 어디서 날라와 뿌리내린 텃밭 모퉁이의 코스모스, 바람에 하늘거리는 가벼운 몸짓이 한가롭습니다. 갓 피기 시작한 녹차꽃은 수줍은 듯 요염하고, 산국도 한껏 부풀어 오른 몽오리가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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