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양통신 27

by 김치호

집 이름을 ‘자미산방(紫薇山房)’으로 지었습니다


어느덧 12월 하고도 중순입니다.


오랜만에 이 공간에 글을 올립니다. 한 동안 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었습니다. 정확히는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 절망과 무력감에 휩싸여 외부와는 최소한의 연락만 유지한 채 뉴스 SNS 등과 같은 소통 채널을 다 끊고 지냈습니다. 오로지 몸을 움직여 얼마간의 땀을 흘리며 초목과 대화하고, 공기 속의 물기와 바람의 흐름을 가늠해보려 했습니다.


양명하고 따뜻한 이곳도 그저께부터 확연히 냉기가 느껴지더니 어제는 영하 5도, 오늘은 영하 7도를 기록합니다. 해가 중천에 떠있는 낮에는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니 그나마 마음도 녹고 몸도 견딜만합니다. 텃밭의 무와 배추는 급한 대로 방수포를 덮어씌웠습니다만 어한이 될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처럼 추운 날 난방비 걱정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요? 집 난방이 기름보일러이다 보니 없는 살림에 기름값이 부담이 안 된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지난해는 난방용 등유가 1리터에 900원 정도였는데, 지금은 1,550원. 올해 안으로 임업직불금이 얼마 나온다니 그것으로 버텨볼 생각입니다.


2022년이 이제 딱 보름을 남기고 있습니다. 12월의 도시는 송년회다 평가회다 이런저런 모임으로 번다한 때인데, 한 때는 열심히 그 흐름에 휩쓸려 살았지만, 그런 삶에서 벗어나 악양에 귀촌한 뒤로는 11월부터 한 달 여가 나름 바쁘고 의미 있는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농촌에서는 이 무렵이 추수와 갈무리로 바쁠 때여서, 조금씩 그 세계로 들어가 보는 나날이기도 했고요.


11월 초부터 대봉감 수확으로 바쁜 지인의 일손을 보태면서 한편으로 ‘직접 키운 감’을 수확하는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직접 키웠다“는 표현은 사실 정확지 않은 표현입니다. 겨울에 가지 좀 쳐주고, 여름에 풀 베고 방제약 몇 번 뿌려준 것이 전부니, 키운 공의 열에 아홉은 하늘과 땅의 몫으로 돌려야 마땅하지요.


올해는 정말 감이 풍년입니다. 발갛게 익은 대봉감은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따는 재미도 여간 쏠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가운 햇살에 땀을 흘리면서도 결코 노동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설사 그것이 노동이라 한들 참으로 즐거운 몸놀림의 시간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수확한 대봉감은 일차적으로 이곳 생활을 시작할 때 관심을 가지고 격려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조금씩 택배로 보냈고, 크기가 작거나 상처 난 감으로는 곶감과 말랭이를 만들고 식초도 넉넉히 담궜습니다. 한 그루는 따지 않고 관상용(?)으로 남겨두었는데요. 낮에는 따가운 햇살을 받고 밤에는 찬 서리 맞으면서 나무에 달린 채 홍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풍경도 풍경이지만 그 홍시 하나씩을 새들과 사이좋게 나눠먹는 것도 여간 특별한 호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11월 말에는 하동장에 나가 단감나무와 무화과나무 등 유실수 묘목 몇 그루를 사다 심었습니다. 올 초 심었던 묘목들 가운데 심한 가뭄으로 말라죽은 것과, 풀 벨 때 예초기로 날려버린 자리를 메꾼 것입니다. 이 추운 계절에 무슨 묘목을 심느냐고 하시겠지만, 남쪽에서는 원래 과수 묘목을 11월 초순부터 12월 중순에 심어야 착근과 생육에 좋다고 합니다.


어제는 감 따는 일을 도와준 집에서 얻어온 물러지고 못생긴 대봉감으로 식초를 추가로 담그고, 자미화 라일락 양다래 등 꽃나무와 유실수 서너 그루를 더 심는 것으로 올해 일을 대충 마무리했습니다.


자미화(紫薇花 배롱나무, 백일홍)는 이른 봄에 심을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여수의 정원농원 사장이 모양새 좋은 두 그루를 집까지 배송해 주겠다기에 기회를 잡은 것이지요. 굵기가 어른 손목 정도 되는, 그다지 크지 않은 것이지만 자세가 참 마음에 듭니다. 정성 들여 심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게 지지대를 설치했습니다. 저 자미화가 잘 자라 이 집을 지키는 지킴이가 되어줄 것을 염원하며 그동안 마음속으로 이 이름 저 이름 썼다 지우다를 반복해 왔던 집 이름을 ‘자미산방(紫薇山房)’으로 지었습니다.


차갑고 건조한 날씨에 곶감은 잘 마르면서 맛 들어가는 듯합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함께 곶감과 녹차 잔 앞에 놓고 차담 할 때를 가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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