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부천명 부해의 (樂夫天命 復奚疑)”
새벽녘 빗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밖은 어둡고 딱히 할 일도 없는 백수 촌부(村夫)는 이불속에서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게으름을 떨고, 그렇게 산골 외딴집의 하루가 시작됩니다. 문득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지가 한참 되었다는 생각에 빗소리 동무삼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연말 연초에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몇 모임에다 처리할 일도 있어 서울을 다녀왔습니다. 열흘쯤 집을 비웠으니 꽤 긴 출타였습니다. 서울은 여전히 복합적인 소음과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서울을 떠나 귀촌한 지 얼마 되었다고.... 바삐 오가는 차와 사람들의 흐름을 따르기 어려웠고, 밖이든 안이든 탁하고 소란스러웠습니다. 지난날 저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살았던 잿빛 도시는 조금씩 낯선 곳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산촌의 새벽 기운에는 청신함이 가득합니다. 아직 절기상으로 소한과 대한 사이라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지는 못하지만, 창밖의 풍경만으로도 그 청신한 기운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청(淸)함은 냉(冷)함으로 더욱 청(淸)하다고나 할까요. 거기에다 오늘은 겨울비가 넉넉히 내리고, 그 비를 맞으며 미동도 않은 채 입석(立石)*처럼 대나무들이 도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안개가 연출하는 흐릿하고 몽환적인 분위기.... 아! 저것이 바로 우죽(雨竹)의 미학일 것입니다.
산골 촌부라고 해서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감나무와 매실나무 가지치기도 해야 되고 녹차밭 검불도 걷어내야 합니다. 어제는 그동안 미루어왔던 큰일을 하나 마무리했습니다. 엄나무와 두릅나무 묘목 심기를 끝낸 것입니다. 각각 30주씩 심었으니, 올해 수확은 기대하기 힘들더라도 내년 봄이면 두릅과 엄나무 순이 넉넉히 식탁에 오를 것이고, 그 정경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 입맛이 돌고 마음도 덩달아 푸근해집니다.
이곳에 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두릅과 엄나무는 키우기가 참 쉽다고 합니다. 제초제나 살충제를 칠 필요가 전혀 없는 데다 특히 두릅은 꺾꽂이도 잘 되고 그냥 드문드문 심어놓으면 번식력이 좋아 금방 퍼진다고 하는군요. 그런데도 맛과 향이 좋아 봄날 식탁의 귀인 대접을 받지요. 당연히 가격 또한 만만치 않는데요. 지난해 중간 수집상들이 마을을 돌면서 할머니들이 따온 첫물 두릅 상품(上品)을 1kg에 35,000원 주고 사 가더군요. 그런 두릅보다 더 높게 치는 게 엄나무 순입니다. “두릅 팔아 엄나무 순 사먹는다”는 말처럼 엄나무 순은 두릅보다 더 비싸고 맛도 좋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논밭에다 가시 없는 개량종 엄나무(은개나무)를 심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때맞추어 비가 넉넉히 내렸으니 두릅과 엄나무 묘목의 착근 여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긴 겨울가뭄으로 꺼칠해져 있던 녹찻잎도 윤기를 되찾고, 더불어 매화의 꽃망울은 좀 더 빨리 부풀어 오르겠지요.
사족으로 도연명(陶淵明)의 시구(詩句) 하나를 덧붙입니다.
“낙부천명 부해의 樂夫天命 復奚疑. 저 천명을 즐기면 되지 (그만이지), 다시 무엇을 의심하(거나 망설이)랴.”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마지막 구절인데, 이곳 악양으로 내려올 무렵 마음에 담았던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곳 마을이름이 입석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