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양통신 29

by 김치호

내일모레가 입춘입니다


‘어어...’ 하는 사이에 1월이 가고 2월입니다. 하루 지난 달력장을 넘기려다 잠시 멈추고 오세영 시인의 시 한 구절을 생각나는 대로 중얼거립니다.


2월 (오세영)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

..............


‘벌써’라는 시어(詩語)에는 1월을 보내는 아쉬움보다는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따라 그 기다림이 간절해지는 것은 유난히 매서웠던 추위에다 어디 한 곳 마음 붙일 데 없는 작금의 사회 상황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2월이 되었으니 뜰의 매화는 봄을 기다리는 주인의 마음을 자양분 삼아 열심히 꽃몽오리를 부풀리겠지요?


내일모레가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입니다. 계절의 순환은 어김없어 며칠 사이에 매서운 추위도 한풀 꺾이고 바람결에 봄기운이 살짝 실려 있는 듯합니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주변의 산색과 나무 가지에서도 봄기운이 감지되는 것은 저만의 느낌일는지요. 그런 섬세한 감각이 아니더라도 봄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만은 어찌할 수 없는 2월의 둘째 날입니다.


이곳은 남녘이라 추위는 덜하고 봄소식은 빠릅니다. 이 무렵이면 매화가 꽃망울을 한껏 부풀리고 있을 때인데, 올해는 혹한 때문인지 꽃망울은 작고 그 형세도 조금 빈약합니다. 사는 곳이 고도가 있는 산자락이라 더 그럴지도 모르지요. 개중에는 참지 못하고 일찍 꽃망울을 터뜨렸다가 추위에 얼어버린 녀석들도 보이고요. 아직은 기다림의 시간인 것 같습니다.


아침 산책길에 매실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있는 노부부를 만났습니다. 제법 이른 아침 시각부터 부지런히 전동가위를 놀리는 그분들 앞에서 한가하게 산책하는 제 모습이 조금은 민망스러웠지만, 잠시 나눈 이런저런 얘기 가운데 올해는 겨울가뭄과 혹한으로 매실과 녹차 작황이 많이 부진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던 말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자미산방 주변에는 매실나무가 여러 그루 있고 얼마간의 녹차나무도 있습니다. 이전 땅 주인이 가꾸다 내버려 둔 매실밭과 녹차밭인데요. 여러 해 가꾸지 않아 야생으로 돌아간 것을 지난해부터 얼치기로 가지치기를 하고 칡덩굴과 잡풀을 열심히 걷어낸 공덕(?)으로 제법 모양새를 갖추어가고 있습니다. 올해도 며칠 전부터 가지치기를 한다고 하긴 했습니다만, 출하 판매는 언감생심이고 매실청 담그는 정도의 수확이면 충분하기에 농약도 안 치고 거름도 안 주니 씨알은 잘고 때깔도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3월 중순이면 자연스럽게 자라 무성한 가지마다 흐드러지게 피는 매화가 그 부족함을 충분히 보상하기에 유감은 없습니다.


가뭄의 영향은 녹차잎 생육 상태를 보면 한층 두드러집니다. 윤기가 흘러야 할 잎이 생기를 잃고 일부는 누렇게 말라가고 있어 초보 농사꾼의 눈에도 올해 녹차 농사는 어려움이 많겠다 싶습니다. 지난해 대봉감 풍년에 자만하지 말라는 자연의 경고일 수도 있겠고요.


오후 들어 바깥공기에 냉기가 실리고 있습니다. 아직 봄은 오지도 않았는데 봄을 입에 올리는 것이 가당찮다는 신호일까요? 그래도 입춘이 되면 곧 다가올 우수 경칩이 유난히 더 기다려지고, 청명 곡우 또한 그렇습니다. 우수 경칩은 매화의 계절이고 청명 곡우는 꽃나무 심고 찻잎 따는 절기입니다. 기다림의 시간, 설렘의 시간. 향긋한 매향과 배릿한 녹차향을 떠올리며 머잖은 연둣빛 봄날을 생각합니다.

작가의 이전글악양통신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