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양통신 31

by 김치호

녹차나무 씨를 넣고 개복숭아 묘목을 심었습니다


3월로 접어들면서 봄으로 가는 시간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얼굴에 와닿는 바람결에 온기가 느껴지고,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악양 들판도 조금씩 푸르름이 더해집니다. 섬진강 물색에도 봄빛이 묻어나고요. 내일모레가 경칩(驚蟄)이니 봄은 벌써 우리 곁에 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둑처럼.


그러나 유난히 추웠던 겨울의 기억 때문인지 아직은 봄이라기보다 겨울의 끝자락이란 말이 편하게 다가옵니다. 거처가 산 쪽인 데다 계곡을 끼고 있어 밤에는 기온이 많이 내려가고, 오늘은 바람까지 불어 춥습니다. 간절기, 춘래불사춘, 꽃샘추위 등등 이 무렵 회자되는 말들이 올해도 어김없이 한동안 몸과 마음을 움츠리게 하겠지요. 선돌이 물그릇의 얼음을 깨 주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는 일상도 좀 더 계속될 듯싶습니다.


자미산방(紫薇山房)의 봄은 매화가 피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곳 매화는 평지보다 조금 늦은 우수(雨水) 무렵부터 하나둘씩 피기 시작하여 3월 중순에 만개하고 4월 초순까지 이어집니다. 매화의 시간표 상으로 보면 지금이 대략 1/3 지점을 지나고 있는 셈이지요.


자미산방의 매화는 조금 별난 데가 있습니다. 집 주변에 한두 그루 있어 꽃을 피우는 모양새가 아니라 집의 동쪽 남쪽이 온통 매실밭으로 둘러싸인 데다 군데군데 자생하는 매실나무도 많아 만개시에는 진한 매향과 꿀벌의 웅웅 거리는 소리로 정신이 어질어질해집니다. 자랑도 아니고 과장도 아닙니다. 매화 철에 이곳을 한 번이라도 다녀간 사람은 그 광경이 두고두고 그리워합니다. 바야흐로 그때가 되어 가는지 며칠 전부터 들리기 시작한 벌들의 꿀 따는 소리가 점점 소란스러워지고 있습니다.


봄날 흐드러지게 피는 매화만으로도 자미산방의 풍광은 부족할 데가 없지만 이곳에 집 짓고 산 지 근 2년, 계절이 여러 번 바뀌었고 철 따라 전개되는 새로운 풍광과의 교감과 소통의 폭을 조금씩 넓혀왔습니다. 그 키워드는 ‘거침’과 ‘야생’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바위와 칡덩굴, 잡초로 뒤덮인 집 주변 땅을 가능하면 있는 그대로 두겠다는 것이 초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변하기 마련인지 때때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고 그 생각들이 정리되면 약간 손을 대고 나무를 심었습니다. 큰 틀은 지난해 초 장비를 불러 거칠게나마 땅을 다듬은 뒤 대봉감 자두 무화과 등 과수 묘목과 동백 배롱나무 라일락 등 관상수 몇 그루 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요.


얼마 전 또 한 가지 일을 벌였습니다. 그간 마음에 두어왔던 계곡 주변을 정리한 것인데요. 사실 거실에서 큰 창으로 내다보이는 대나무숲은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자미산방의 제1경입니다. 계곡 건너편(彼岸)의 대나무 숲과 어울리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차안(此岸)에는 녹차 씨를 뿌려 계곡 따라 녹차밭을 만들고 그 중간중간에 개복숭아 묘목을 심어보자고 마음을 정한 지는 한참 되었습니다. 차일피일하다가 녹차 씨의 발아시기와 묘목의 착근 등을 고려할 때 더는 미룰 수가 없어 실행에 옮긴 것이지요. 과일상자 한 개 분량의 녹차 씨는 집 앞의 차밭에 떨어져 있는 것을 그냥 주우면 되었고요.


지금 씨 넣고 묘목 심었다고 해서 바로 눈앞에 가시적인 풍경이 전개되는 것은 아닙니다. 녹차나무는 생장 속도가 느린 데다 개복숭아 묘목이 자라 제대로 꽃 피우기까지 4~5년은 족히 걸리니 녹차잎의 싱그러움과 개복숭아꽃의 요염함(?)이 어우러지는 풍경의 전개는 먼 훗날에서야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기다림 없이 열리는 자연의 문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이 글을 쓰다 말고 바깥을 보니 걱정스러운 정경이 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계곡에 접하고 있는 대나무들이 생기를 잃고 잎이 허옇게 말라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대나무는 시골집 구들장을 뚫고 올라올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지만 추위에는 약한 편입니다. 중부 이북 지역에 대나무가 자라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지금의 허연 모습은 지난 겨울의 혹한과 계곡으로 쏟아져내리는 찬바람 때문이었을까요? 어서 날이 풀리고 비가 와서 저 허연 잎들이 다시 초록의 생기를 찾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만.... 그 또한 자연이 하는 일입니다.


내용 없는 글이 자꾸 길어집니다. 그렇다고 선돌이 근황을 생략할 순 없군요.


자미산방의 일상은 선돌이가 중심이 되어 돌아갑니다. 이제 태어난 지 딱 석 달, 이곳에 온 지 한 달 반인데요. 주인과 타인을 구분하기 시작했고 말귀도 조금씩 생겨나는 듯합니다. 그러면서도 넘치는 에너지는 주체할 수 없는지 주변을 천방지축으로 뛰면서 돌아다니는 데다 내가 집 밖에 나가면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뒹구는 통에 흰둥이가 반쯤 누렁이가 되어가고 있고요. 얼마 전에는 1년 전에 심고 지금껏 금쪽같이 보살펴온 새끼대봉감나무 한 그루를 부러뜨리더니 요즘은 돋아나는 수선화 국화 작약의 새싹을 뜯어먹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싫증 나면 양지바른 거실 앞 잔디에서 팔자 편하게 네 다리 쭉 뻗고 오수를 즐기는 꼴이란....


선돌이를 모셔왔다는 소문을 듣고 선돌이를 보러 오겠다는 지인들이 늘고 있습니다. 벌써 다녀간 사람도 있고요. 빈 말이라도 사람 사는 집에 사람 보러 와야지 강아지 보러 온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요?


그렇게 오시더라도 기꺼이 직접 만든 곶감과 녹차로 차담상을 차려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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