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양통신 4

by 김치호

지리산에 올랐습니다


이번 산행은 지리산의 제2봉인 반야봉(해발 1,732m)에 올라 늦가을 지리산의 넉넉한 풍광과 기운을 온몸으로 느껴보면서 조만간 시작될 집터 조성 작업을 앞두고 마음을 다스리는 컨셉으로 계획되었습니다. 조금 거창한 듯싶지만, 고유제(告由祭) 또는 개토제(開土祭)의 의미를 담은 산행이라 해도 될까요. 옛사람들은 집을 짓기 전에 관련 신령에게 사유를 고하고 집터의 수호신인 산신이나 토지신의 허락을 청하는 예를 올렸다는데, 자연과 교감하고 함께하며 살아갔던 선인들의 그 정신을 악양에 지어질 집에도 담아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늘 그래왔듯 익숙한 혼자만의 산행. 신새벽 어둠이 조금씩 걷힐 무렵, 피아골 연곡사(鷰谷寺)를 출발했습니다.


직전마을을 지나 삼홍소(三紅沼)까지는 계곡을 옆에 끼고 이어지는 비교적 평탄한 길입니다. 새벽 공기는 청신했고 계곡 물소리가 맑고 깊었습니다. 유명한 피아골 단풍은 며칠 전 내린 비와 강풍으로 거의 다 지고 없었지만, 그게 오히려 색다른 늦가을의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구름 조금 낀다는 전날의 일기예보가 틀렸는지, 삼홍소를 지나 고도가 조금씩 높아지자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기온은 시시각각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깊은 산속의 가을 날씨는 변화무쌍하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더욱이 피아골 대피소 지나면서부터 길은 가팔라지고 거기에다 굵어지는 싸락눈, 짙은 안개,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곰이 그려진 야생동물 출현 경고 안내판.... 근 3시간 반 동안 사람구경을 전혀 못했고 순간순간 두려움과 무서움이 엄습하여 몸을 떨었습니다.


산행을 시작한 지 4시간쯤 지난 10시 반 무렵 종주 능선길에 합류한 뒤 처음 사람을 보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조금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10m 앞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에다 매서운 강풍으로 빠르게 고갈되고 있는 체력을 생각하며 마음을 바꿔먹어야 했습니다. 당초 계획대로 반야봉에 오르려면 종주능선에서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데, 악천후도 악천후지만 얼마 남지 않은 체력으로 반야봉 가파른 비탈길은 무리다 싶어 그 반대 방향인 노고단ㅡ화엄사 쪽으로 향했습니다.


11시 30분 좀 지나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했고, 새벽에 공양주 보살이 챙겨준 김밥과 사과 1개, 단감 1개로 간단히 요기한 뒤 서둘러 화엄사 쪽으로 하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산 길 가운데 약 3km가 가파른 내리막길인 데다 바위길 위에는 비에 젖은 낙엽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미끄럽고 위험했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 미끄러지기도 했으나 가벼운 찰과상에 그쳤으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쉬지 않고 걸어 오후 2시 반에 화엄사 도착했으니, 대략 8시간 산행이었습니다. 당초 계획했던 반야봉에 오르지 못했으나, 산행 내내 지리산의 의미를 생각했고 악양에 지어질 집을 생각했습니다. 지리산의 넉넉한 기운이 집에 담아지길 빌었고, 그 기운의 도움으로 악양에서의 삶이 좀 더 자유로워지길 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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