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삶을 걷는 그 사람을 듣다.

이동목욕을 하며 만난 사람들

by clieker

다양한 장애인분들이 이동목욕서비스를 이용했다.

마땅한 목욕시설이 없는 노후한 주택에서 고령의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정신지체인 남자 중학생, 생일날 감전사고로 인해 의사표현을 못하고 어머님과 할머님의 돌봄을 받으며 와상생활을 하는 짧은 머리의 10대 소녀, 대로변에 있는 철거를 앞둔 낡은 상가에서 도장을 파며 생계를 꾸리는 중년 남성 소아마비 장애인, 뇌병변으로 인해 한평생 거동과 대화가 불편했지만 시를 쓰고 외부활동을 좋아하는 젊은 여성, 어린 시절에는 마음껏 활동했지만 루게릭병으로 인해 근육이 점점 소실되어 결국 자신의 의지로 걸을 수도 앉을 수도 없어 누워서 생활하는 20대 초반의 청년, 젊은 시절 기자 생활을 하며 잘 나갈 때도 부인인 할머니 속 많이 썩히고 중년이 되어서는 뇌출혈로 쓰러져 수십 년째 할머니 병수발 받으며 생활하던 괴팍했던 할아버지, 수 십 년간 흐릿한 의식으로 와상 생활하는 자신을 돌보느라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된 남편을 배우자로 둔 눈가에 항상 눈물자국이 있던 할머님들,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 6층에서 수년간 외출하지 못 한 채 할머님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던 풍채 좋으신 하지 장애인 할아버지, 젊은 시절 건설 회사를 운영하며 돈도 많이 벌었지만 사고로 인해 척수장애를 입은 장년 남성...

처음 만날 때는 그냥 이동목욕 서비스가 필요한 장애인과 가족이었다. 하지만 몇 번의 만남을 통해 그분들의 삶을 지켜보고, 지나온 이야기를 들으면 각자의 방법으로 스스로와 가족의 삶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큰 고통들을 감내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분들이 지나왔을 하루하루를 되새겨 보며 ‘나라면 감당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을 여러 번 해 보았다. 그 노력에 대한 존경으로 그분들을 대하게 될 때, 그냥 이동목욕서비스 대상자, 그냥 장애인 가족은 더 이상 없었다. 다들 특별한 한 분 한 분 이었다.

월 1~2회 이동목욕서비스를 위해 지속적으로 장애인 당사자와 보호자들을 만나며 요즘 지내는 이야기, 예전에 지냈던 이야기들을 나눈다. 종종 보호자 중에는 계속 장애인 가족을 돌보느라 힘들었을 것인데 잠시 쉬시지 않고 자신도 직원들과 함께 장애인목욕에 참여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셨다. 보호자와 함께 장애인분을 목욕 시킬 때면 유독 많은 이야기가 오간다. 목욕시간이 매우 시끄럽고 한편 유쾌해 진다. 이용자 중에는 목욕을 매우 기다리고 즐기는 분들도 계셨고, 뇌병변장애로 의사표현은 명확하게 못하지만 봉사자들 손을 때리거나 꽉 잡고 놓지 않는 것으로 거부의 의사표현을 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그런 경우 어렵게 오신 분들에게 왜 그러냐는 보호자들의 언성 높은 잔소리가 함께 했다. 때로는 의식이 없이 몸을 맡기지만 물에 몸이 닿을 때 긴장했는지 감은 눈이 약간 꿈틀거리거나 몸이 떨리는 대상자 분들도 계셨다.

이용자 분들 중 아픈 남편을 돌보는 할머니들을 많이 뵐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반대로 아픈 할머니를 돌보던 할아버지들에 대한 기억들이 유독 많이 남는다. 불광동의 빌라 지하방에 거주하시던 70대 중반의 할아버지는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병상생활을 하는 아내를 돌보고 있었다. 할머님은 뇌병변으로 인해 오랜 기간 와상생활을 했고 당뇨합병증으로 인해 한쪽 다리를 절단했다. 할머님은 가정에서도 목에 기관 삽입관을 해야 했고, 가끔씩 눈을 깜박이는 것 말고는 비언어적인 의사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하셨다. 할아버지는 24시간 홀로 할머님을 돌봐야 했다. 기본적인 위생관리, 코에 호스를 연결하여 유동식을 제공하는 식사 관리, 배변, 욕창방지를 위한 자세 변경 등을 도맡아하셨다. 보통 목욕을 위해 장애인분을 욕조로 옮길 때 공공근로 선생님과 함께 옮겼는데 할아버지는 항상 본인이 함께 아내를 옮기겠다고 하셔서 할아버지와 함께 할머니를 욕조로 옮겼다. 그때는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실시되기 전이어서, 매우 값비싼 간병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는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온전히 가족들의 손으로 중증 장애인인 가족을 돌보아야 했다.

할머니 방에 걸린 사진을 보면 젊은 시절 할아버지는 헬스를 많이 하셔서 엄청난 근육을 가졌었고, 보디빌딩대회에서 수상한 메달을 목에 걸고 포즈를 잡은 사진들이 여러 장 있었다. 할아버지의 풍채는 어느 젊은이 못지않게 건장하셨지만 이제는 혼자 침대에 누워있는 아내의 자세를 바꾸고 돌보는 것이 쉽지 않다며,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고 고민을 하곤 하셨다. 할아버지에게는 또 다른 고민도 있었다. 식사를 유동식으로 해야 하는데 유동식의 가격이 만만치가 않았다. 은퇴 후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여유를 느껴야 할 노년기에 할아버지의 하루하루는 병상에 누운 할머니를 돌보느라 본인의 몸이 상하는 것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는 시간들 이었다. 말씀은 못 드렸지만 이 상태로 얼마나 버티실 수 있으실까 라는 걱정이 항상 들었다. 그래서 경제적인 후원이 들어오면 할아버지 댁에 유동식을 몇 박스씩 제공하곤 했다.

서비스 대상자였던 장애인분들 중 노인 분들이 많았지만 종종 젊은 대상자도 있었다. 그 중 20대 중반의 청년이 있었다. 중학교 때 까지만 해도 건강상 이상이 없었는데 고등학교 졸업 무렵 기력이 약해지고 몸의 이상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병원에서 루게릭병 판정을 받았고 근육은 천천히 소실되었다. 뛰기가 힘들어지고, 걷기가 힘들어지고, 서기가 힘들어지고, 앉기가 힘들어지고, 숨쉬기가 힘들어 졌다. 20대 초반의 나이에는 혼자 힘으로 침대에서 앉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모든 일에 도전할 수 있고 무엇도 두렵지 않을 시기에 자신의 육체가 조금씩 힘을 잃어 자신의 의사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움직임인 식사, 목욕, 배변 등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타인의 손을 거쳐야하는 현실은 어느 누구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은 본인에게도 있었고, 이를 지켜 볼 수밖에 없는 부모와 가족들에게도 있었다.

보통 목욕서비스를 제공받는 분들은 의사표현을 충분히 못하거나 서비스제공자의 의사대로 몸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 청년은 전동 침대에서 욕조로 몸을 옮길 때, 목욕을 할 때 자세의 불편함과 통증 등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하였다. 그래서 봉사자분들은 가급적 밖에 있도록 하고 오랜 경력을 가진 공공근로 선생님과 둘이서 전체 목욕과정을 진행 할 때가 많았다.

청년은 자신의 병의 진행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청년에게 어떤 농담을 하기도, 희망의 말을 하기도, 위로의 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최대한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목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증산동 언덕의 빌라단지 고층에 거주하는 한 노부부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군에서 근무했고 꽤 고위직까지 올라갔었다. 할머님은 젊은 시절 교편을 잡으셨다. 두 분에게는 딸이 한 명 있었는데 딸은 매우 오래 전에 결혼하여 해외로 가서 두 분이 서로 의지하고 지내셨다. 두 분 다 연금으로 생활하실 만한 분이셨는데 어떤 사정이 있으신지 경제적으로 넉넉하신 상황은 아니었다. 할머님 집 화장실 욕조에는 물이 항상 한 두 방울씩 멈추지 않고 떨어지고 있었다. 수도꼭지가 잘못되거나 제대로 잠기지 않은 것 같다고 고쳐드릴까요? 라고 여쭤보니 할머님은 저렇게 해서 물을 받으면 수도 모터가 돌아가지 않아 수도세가 안 나온다고 하셨다. 그 말씀이 맞는지는 굳이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할머님은 다른 어떤 젊은 사람들 보다 깔끔하고 정갈하게 집을 정리하며 살고 계셨다. 젊은 시절 교사이셨던 할머님은 유머와 센스가 있으셨고, 그 연배 어르신들의 넘치는 정도 갖고 계셨다. 외국에서 온 봉사자들에게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외국생활에 대해 직접 물어보시는 쾌활한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수십 년 전 중풍이 와서 말씀이 매우 어눌하셨지만 매우 좋은 풍채와 점잖은 태도에서 젊은 시절 어떻게 지내셨을지 짐작이 갔다. 할아버지의 지적인 부분은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단지 언어적 표현이 안 되는 상황이라 무척 답답해하시는 표정을 늘 볼 수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두 분이 사는 빌라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할아버지가 수년간 외출을 못했다는 것이다. 병원약도 할머님을 통해서 구입한다고 하셨다. 사람구경 하기가 어려웠던 할아버지에게 이동목욕을 하러오는 직원들과 봉사자들은 참 반가운 사람들이었다. 말씀은 잘 못하시지만,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할머님은 목욕하는 내내 수많은 주제로 많은 말씀을 하셨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할머니 말고는 다른 사람과 만남이 거의 없는 할아버지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려 애쓰셨던 것 같다.

하루는 목욕서비스 제공 후 지역사회재활팀에서 실시하게 된 나들이 프로그램 참여를 권했다. 할머님은 할아버지는 집에서 못 나가신다고, 엘리베이터도 없고 집 밖에 수년 동안 나가 본 적 없다고 이야기하셨다. 하지만 그 부분은 각오하고 권했던 것이다. 할머님에게 할아버지의 풍채가 좋기는 하시지만 업어서 옮길 수 있다고 보호자도 함께 가는 나들이니 할머님도 같이 바람 쐬러 가자고 말씀 드렸다. 할머님은 미안해서 그렇게 못한다고 여러 번 거절 하셨지만 할아버지에게 꼭 나들이를 시켜 드리고 싶어 수차례 권한 후 참여하시겠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나들이 당일 두 분은 평소보다 더 잘 차려입으셨다. 할아버지를 업고 무게를 온전히 느끼며 계단을 내려갈 때 내가 오늘 써먹으려고 155미리 곡사포대에서 군 생활을 하며 그렇게 많은 포탄을 옮기고 약 7톤의 대포를 몇 명의 힘으로 옮기는 것을 몸에 익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무사히 할아버지를 차량까지 옮겼고 나들이 동안 할아버지는 여러 번 불러 손을 잡으시면서 말씀은 제대로 못하시지만 고맙다는 표현을 하시고 눈을 마주쳐 주셨다.

당시 함께 근무한 팀장님과 팀원들이 지금 생각해 보면 좀 무모한 부분들이 있었다. 오랜 와상생활로 인해 건강이 약해진 중증장애인에게 감염의 위험, 낙상의 위험이 있을 때, 언덕꼭대기나 차가 들어가기 어렵고 차를 돌릴만한 공간이 없는 좁은 골목 끝에 사는 분이 이동목욕서비스를 신청할 때, 엘리베이터도 없는 빌라 꼭대기에 거주하여 차량이나 욕조가 올라가기 매우 어려운 상황일 때도,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여러 장애요인에도 불구하고 가정에 방문하여 이동목욕서비스를 제공했다. 나들이 프로그램의 경우도 제한된 예산과 이동차량의 한계가 있지만, 참여하실 분 한 분 한 분을 이야기하다보면 나들이 규모가 커지고 프로그램 내용이 많아졌다. 내가 관리자였다면 참 불안했을 팀이었다. 그래서인지 십 수 년이 지난 후에도 당시의 팀장님, 팀원들과 반갑게 연락하며 지낸다.

업무의 특성상 육체적으로 고된 일이다 보니 복지관에서는 목욕 업무 이외 다른 부담을 주지 않았다. 이동목욕 근무 기간이 길어지며 어느 순간 현실에 안주하는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편 사회복지기관에서 내 나이에 배우고 쌓아야 할 역량들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그래서 무엇인가 프로그램을 운영해 보고자 했고, 노인 장애인분들을 많이 뵙다 보니 노인들의 건강관리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낙상으로 인해 장애를 입게 되거나 삶의 질이 크게 떨어지는 노인들을 보고 예방적 차원에서 노인에게 적합한 운동 프로그램을 추진하기로 했다. 타 기관의 사업을 조사해 보던 중 마포노인종합복지관에서 운영하는 고무줄 스트레칭 프로그램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해당 기관에 양해를 구하고 강사분이 고무줄 스트레칭 하는 것을 녹화하여 여러 번 시청한 후에 재구성 하였다. 간호사인 팀장님의 검토를 받으며 몇 가지 수정을 하였고 지역내 경로당을 방문하여서 경로당 회장님께 취지를 설명 드린 후, 주 1회 15명 내외의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고무줄 스트레칭을 진행하였다. 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잔잔한 옛 노래에 맞춰 긴 고무줄을 본인의 관절과 근육의 가동범위 내에서 늘리는 동작이어 안전한 운동이었다.

2005년 당시 이동목욕 차량 한 대당 약 5,000만원의 예산이 지원되었다. 예산은 해가 지나도 변함이 없었다. 그 예산은 직원1명의 전체 급여, 직원 1명의 일부 급여, 유류비 및 차량 관리비, 목욕 용품 구입비, 목욕서비스 대상자를 위한 약간의 프로그램비 등으로 편성되었다. 해가 변하고 나의 급여가 오르면서 그나마 얼마 되지 않던 프로그램비가 더 줄어드는 것을 보며 기분이 참 좋지 않았다.

약 18개월간 이동목욕서비스를 하며 매일 장시간 운전하고 욕조, 사람, 펌프 등을 옮기는 일을 반복해서 하다 보니 허리에 탈이 났고 결국 디스크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몇 가지 고민을 한 후 복지관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동목욕팀에서 근무하다가 허리에 무리가 간 남직원들이 다른 팀으로 자리를 옮기곤 하였다. 동갑내기 친구인 직원들과 함께 일하다보니 장기적으로 근무하게 되면 몇 개 되지 않는 관리직급에 올라가기 위해 이 안에서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반갑지 않았다. 자라나는 아이를 보며 안정적이고 큰 조직에서 근무하고 싶은 마음도 생겨 다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였다. 아이도 태어난 상황이어 과거와 같이 새로운 직장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현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직장이 집과 가까운 덕에 6시 퇴근 후 집에서 저녁을 먹고 도서실에 가서 새벽 3~4시까지 공부한 후 다음날 아침 출근하는 생활을 두 달 정도 하였다. 내 생에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시간이었다. 다음 연도에 합격을 바라고 시험분위기나 익혀본다고 시험을 봤는데, 운 좋게 합격하였고 고양시에 임용되었다. 그렇게 사회복지전담 공무원이 되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거친 삶을 걷는 그 사람을 듣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