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냉동고 주문했더니 중고를 보냈네요. 그 뒷 이야기
19년 전 우리 가족이 인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가장 날씨가 더운 6월 초였다. 한증막이 따로 없었다. 수도 델리에 정착을 했지만 당시만 해도 정전이 자주 되어서 집안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시간이 더 많았다. 콩죽 같은 땀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더위와 싸워야만 했다. 문제는 두 아들이 인도에 적응할 때까지 잠시라도 먹이려고 한국에서 가지고 온 음식이었다. 주인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음식은 날씨에 정직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큰일이다. 어떻게 하지? 한국에서 힘들게 가지고 온 반찬이 상해서 못 먹게 될까 봐 마음 졸이며 나보다 먼저 인도에 온 지인에게 연락을 했다. 인도에서는 냉동고가 필수품이라고 하면서 냉동고 파는 가게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급한 마음에 바로 가게로 전화를 해서 냉동고를 주문했다. 가능한 한 빨리 배달해 달라고 부탁까지 하면서... 다음 날 냉동고가 집에 도착했다. 어찌나 반갑고 고맙든지 무거운 냉동고를 2층까지 들고 올라온 일꾼들에게 시원한 음료수를 대접했다. ‘휴~ 이제 살았다’라고 하면서 한시름 놓았다. 그리고 서둘러 포장된 박스를 조심스레 뜯기 시작했다. 내 평생 냉동고라는 물건을 사용해 본 적이 없기에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다. 드디어 박스를 다 뜯어내고 나니 짜~안 하고 내 허리 조금 위까지 오는 키의 하얀 직사각형 냉동고가 나타났다. ‘와~우 반갑다 냉동고야’ 맘속으로 환영 인사를 하고 바로 냉동고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 오 마이 갓! 이게 뭐야? 이 냄새는 또 뭐고?”
냉동고 문짝 고무바킹에는 울긋불긋 김칫국물 같은 것이 배어 있는 얼룩이 보였고 신김치 냄새와 비슷한 설명할 수 없는 야리꾸리한 냄새가 내 코안으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황당 그 자체였다. 나는 분명히 새 냉동고를 주문했고 배달 온 사람은 새 물건 값을 받아서 이미 떠나버린지 한참이 지났다. 냉동고 가게 연락처를 알려준 지인에게 바로 전화를 해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 물건을 새 것으로 바꾸든지 환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환불요? 인도인들은 절대로 환불해 주지 않습니다. 직접 가서 부딪혀 보세요, 하지만 헛수고가 될 겁니다.
다행히 새것이 있어 바꿀 수 있으면 가장 좋고요 “
당시 우리 가족은 뉴델리에 있는 Green Park 근처에 살고 있었고 냉동고 가게는 Old Delhi에 있다고 했다. 집에서 차로 2시간은 족히 가야 하는 먼 거리일 뿐만 아니라 차도 없고 길도 모르고 주소 하나 달랑 들고 혼자 어떻게 그 가게를 찾아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렇다고 중고 냉동고를 새 물건 값을 주고 사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용할 수는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과감하게 결단을 했다. ‘그래 한번 부딪혀 보자. 중고 물건을 새것으로 속여 팔아먹은 놈들을 그냥 둘 수는 없지. 악착같이 내 권리를 찾아야겠다. 새 물건으로 당장 바꾸어 오든지 아니면 환불을 받든 지...’
올드 델리까지 가는 방법을 전혀 알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탔다. 해방 당시 타던 차인지 굴러가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문짝이 다 찌그러진 낡아빠진 택시를 타고 덜커덩 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달렸다. 에어컨이 없는 택시라 비질비질 땀을 흘리다가 결국 창문을 열었다. 순식간에 날아오는 뿌연 먼지를 한 바가지나 마시면서 우여곡절 끝에 가게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여기저기에 진열되어 있는 냉동고들과 냉장고들이 보였다. 터번을 쓴 시크교도 직원이 나를 보자 반갑게 인사를 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고 하면서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어제 지불한 냉동고 대금 영수증을 내밀었다.
“무슨 일입니까? 영수증에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요, 이 가게에서 냉동고를 주문했는데 어제 당신들이 우리 집으로 보배 준 냉동고에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말이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문제라니요”
“내가 분명히 새 물건을 주문했어요. 영수증 보고 확인해 보세요. 냉동고 박스는 분명 새것이었는데 그 안에 중고 냉동고가 들어있더군요.”
“중고 보낸 적 없어요. 우린 분명히 새 것 보냈어요.”
“새 걸 보냈다구요? 냉동고 문 고무바킹에 울긋불긋 음식물 묻은 자국이 남아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건가요? 냉동고 안에서 악취가 나는 것은 또 왜죠? 새 냉동고 보냈다면서요”
그 물건이 새것이 아님을 조목조목 증거를 대서 따지자 할 말을 잃은 직원이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유아틱 한 제의를 했다.
“그럼 냉동고 문짝 고무 바킹 바꿔 줄게요. 그러면 된 거죠?”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누굴 바보 멍청이로 아나. 사람을 띄엄띄엄 봐도 유분수지, 정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중고 냉동고 문짝 바킹만 바꾸면 헌 물건이 새 물건으로 바뀌나요? 당장 우리 집에 와서 중고 물건 가져가고 새 냉동고로 바꿔 주세요. 지금 우리 집에 한국에서 가져온 음식이 있는데 곧 상할 것 같아요. 날씨가 너무 더워서 말입니다. “
직원이 잠시 고민을 하다가 다시 대책을 내놓았다.
“우리 가게에서 조그마한 냉장고 하나 빌려드리면 되겠죠? 주문한 냉동고 새것 올 때 까지요”
가게에 새 냉동고가 없으면 기다리라고 하든지, 없다고 사실대로 말을 해야지 당장 물건 하나 팔아먹으려고 눈 가리고 아웅 하다니 기가 막혔다. 그 가게와 다시는 거래하고 싶지 않았다.
“필요 없어요. 새 물건 없으면 환불해 주세요.”
“환불요? 우리 가게는 절대로 환불을 해 주지 않습니다.”
“아니, 이건 당신들이 고의적으로 나를 속인 건데 왜 환불을 안 해 준다는 겁니까?”
“인도에서는 어떤 이유든지 손님에게 한번 받은 돈은 절대로 환불을 해 주지 않습니다. 이미 내신 돈으로 여기 있는 다른 물건을 구입하실 수는 있습니다. “
세상에 무슨 이런 법이 있단 말인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날강도에게 당한 기분이 들었다. 이 상황에서 타협도 포기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지불한 냉동고 값 이만 루피(당시 50만 원 정도)를 돌려줄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이 한마디 말을 남기도 나는 가게 구석에 있는 의자에 죽치고 앉았다. 몇 시간이 흘렸는지 모른다. 직원들은 가끔 나를 흘깃흘깃 처다 보면서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바깥을 내다보니 날이 저물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배도 고프고 피곤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환불을 해 줄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는... 직원들이 양심은 있는지, 내가 외국 여자라서 그런지 다행히도 가게 밖으로 쫓아내지는 않았다. 8시간은 족히 가게에 앉아 있었던 것 같다. 퇴근시간이 다가오니 난감했는지 직원 한 명이 주인처럼 보이는 부티가 줄줄 흐르는 시크교도 남자에게 몇 차례 가서 뭐라고 말을 했다. 아마도 ‘저 여자 아직도 안 가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하고 물어본 것 같다. 드디어 주인 남자가 벌떡 일어서더니 내게로 다가왔다. 손에 들고 있는 검은색 가방을 거꾸로 들자 돈다발이 내 앞에 쏟아졌다. 그것도 너덜너덜한 10루피(당시 25원) 짜리 돈다발이....
“이거 가지고 당장 꺼져”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사과를 해도 모자라는 판에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다니 순간 모욕감과 함께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몇 초만에 생각을 바꾸었다. 인도인들은 절대로 환불을 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아무리 애써도 헛수고가 될 것이라는 지인의 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내 앞에 돈다발이 쏟아져있지 않는가. 10루피는 돈이 아니던가! 절대로 환불을 해 주지 않는다는 인도인이 종일 혼자 침묵시위를 하고 있는 나에게 결국 항복을 하고 돈을 돌려준 게 아닌가! 기분이 묘했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암튼 큰 소리로 ‘땡큐’라고 말하고 돈다발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10루피짜리 스무 다발을.... 행여나 소매치기라도 당할까 봐 돈가방을 꼭 끌어안고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그날 밤 나는 10루피짜리라도 냉동고 값 2만 루피를 돌려받을 수 있었음에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너덜너덜하고 지저분한 10루피짜리를 지겹도록 만져보기는 내 생애에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어떤 물건을 사더라도 새것인지 늘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인도인들은 돈을 신으로 섬기기 때문에 들어온 돈이 다시 나가면 복도 함께 떠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도 상인들은 물건을 교환은 해 주지만 환불은 해 주지 않는다. 너무 이기적인 힌두교 문화인 것 같아 솔직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인도에 오자마자 온몸으로 톡톡하게 신고식을 치르면서 시장 문화를 배운 덕분에 나는 더 이상 같은류의 사기를 당하지 않고 교민들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있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