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라렉스 유리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습관적으로 빈 얼음틀에 물을 받았다. 얼음틀에서 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최대한 수평을 유지하며 조심조심 냉동실 구석에 밀어 넣었다. 틀이 들어가야 할 홈이 자꾸 좁아져 한 번에 잘 들어가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이번엔 냉장실 문을 열어 사과농장에서 직접 포장해 온 사과주스를 꺼내 투명한 테이크아웃 잔에서 유리잔으로 옮겨 담았다. 넘치지 않도록 천천히 걸어야 할 만큼 가득 채운 채, 조심조심 거실로 걸어가 빈티지 목재 책상 위에 잔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 잠시 딴생각을 했다.
선풍기 바람을 쐬며 빌 에반스의 “Peace Piece”가 무슨 뜻인지 검색하는 사이에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달그락… 살금살금 눈치를 보며 유리잔 속에서 칵테일처럼 층을 만들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 사과주스를 마시려고 몸을 일으켰더니, 부모님 물건을 깨부순 아이처럼 유리잔이 꼿꼿이 서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벌벌 떨진 않지만 잔뜩 긴장한 듯 온몸이 흠뻑 젖은 유리잔을 덥석 집어들어 사과주스를 반 정도 들이켰다. 벌컥벌컥, 탁. 과일주스는 목구멍이 가득 차도록 마셔주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아깝다는 마음에 주스가 줄어들수록, 조금씩 나눠 마셨다. 사과주스의 진한 노란색이 점점 연해지다가 얼음과 같은 색이 되어 맹물만 남은 후에도 계속 들이켰다. 잔에서 더 이상 사과맛이 나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잔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책상 위에는 내가 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은 횟수만큼 잔의 발자국이 고여 있었다. 책상의 나무결에 스며드는 어수선한 발자국들을 보면서 저 발자국의 온도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 정도 식어 있을까? 저 식은땀의 온도는 차가운 사과주스에서 무더운 우리 집 거실의 온도를 빼고 둘로 나눈 만큼 식은 온도일 것이다. 사과주스와 거실의 중간 정도 온도로 식은 땀이 나무결에 스며들면서 다시 나무책상의 온도만큼 식었다. 거실과 사과주스가 온도 차를 두고 법정 분쟁을 하고 물이 변호사로 나서는 상상이 든다. 중재는 투명한 자의 몫이다. 그런 투명한 물도 나무에 스며들자 어두운 색이 되었다.
서로 원하는 것이 상반된 것들 사이에 끼는 일은 사람도 지겹게 겪는 일이다. 회사 생활이라는 것도 거대한 양측의 이득을 조율하기 위해, 큰 톱니바퀴 사이에 끼어서 잡음을 줄이고 사회가 어떻게든 원활하게 굴러가도록 하는 일이다. 양극단의 중간 온도를 찾느라 흘린 식은땀의 무게만큼 돈을 버는 솔직한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증명하는 것도 땀을 흘리는 것만큼 중요하다.
그런 양측 사이에 낀 상황이 오면 우선순위를 정한 후 상황에 따라 유도리를 발휘하고, 우선순위가 낮은 것은 적당히 뭉개는 것이 지혜라면 지혜일 것이다. 하지만 식은땀을 쉬지 않고 흘리는 유리잔을 보면, 머리에 전기가 ‘찡’ 돌 정도로 차가운 음료와, 세상을 녹일 기세로 여기저기 파고드는 한여름의 열기 사이에 낀 유리잔의 처지라는 건 어떻게든 적당히 뭉개고 넘어갈 상황이 아닌가 보다. 역시 그럴 때는 상극의 두 입장을 중재시켜 줄 부드러운, 공동체마다 한 명씩 있는 익살스러운 녀석이 필요하다. 부드럽고 포용력 있는 물 같은 친구, 아무래도 열 오를 땐 ‘물 한 잔’이다.
- “엘리멘탈”이라는 애니메이션에도 물 캐릭터가 나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역시 그런 관상이다. 물은.
열기를 내뿜는 중식당 내부와 눈이 내리는 한겨울의 길가 사이에도 유리창이 물을 필요로 하는 난감한 상황으로 끼어 있다. 거기에도 둘의 간극이 커지면 물이 흘러내리지 않으려 애를 쓰며 둘 사이를 조금이라도 떼어 놓으려 뿌연 막을 형성한다. 사람의 싸움을 중재할 때도 일단 서로를 안 보이는 곳으로 보내는 것처럼, 두 공간의 눈을 가리는 것이다. 유리창의 물을 손가락으로 긁어 내면 복권을 긁는 것처럼 가게 풍경이 딱 손가락 굵기만큼 나타난다. 투명해진 유리를 통해 열받은 식당 내부와 눈내린 거리의 풍경이 마주 보게 되어도 유리창이 금세 물 막을 형성해 다시 둘의 거리를 벌려두고 “일단 물부터 한 잔 마셔” 한다.
보통 유리만 이런 처지에 처하는 것도 같지만 피부도 그렇다. 열기와 건조함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습기가 필요하고, 매운 음식을 접한 혓바닥도 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더러운 차량과 깨끗한 도시 사이에도 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대와 다른 현실을 직면하게 된 눈에도 물이 맺힌다. 이렇게 물은 양옆에 앉은 두 ( )의 타협점을 찾아준다. 내가 기대했던 결과가 지구 반대편에 있다고 하더라도 눈물 좀 먗방울 흘리고 나면 적당히 마음을 정리하고 무릎의 흙을 탁탁 털어내고 일어날 힘이 조금 생긴다.
사람을 분해해서 이렇게 저렇게 정리해보면 70%가 물이다. 무도가이자 배우, 철학자였던 이소룡은 “물이 되어라 친구여”라고 했지만 위 말이 맞다면 사람은 모두 어느 정도는 이미 물이다. 진정한 그 말의 의미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35%씩은 양쪽으로 배려하라는 뜻인가 싶기도 하고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아마 타협이 안돼는 사람한테는 물 한 잔 뿌리면 된다는 뜻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