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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 귀신

by Anna

힘이 빠진 채 스르륵 걸어 다니는 귀신이 있었다.

대머리 귀신이었다.


무리에서 나와 홀로 걸어다니는 중이었다.

흐르는 강 주변에는

귀신들이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초점잃은 눈빛은 음악 소리에 이끌려 강으로 향했다.


산책길을 따라 가로등은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었다.

대머리 귀신의 머리는 가로등 빛 아래서 광이 났다.


자신의 머리가 눈에 띄는 것을 아는지

대머리 귀신은, 윤이 나는 머리통을 쓸어 만졌다.


운동을 즐기는 인간들이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헐떡거리며 뜀박질을 했다.

목줄을 한 강아지들은

침이 뚝뚝 떨어지는

혀를 길게 내민 채

엉덩이를 씰룩댔다.


간혹 주인의 얼굴을 확인하며

강아지들은 리듬을 타듯

발걸음을 맞춰 걸어갔다.


대머리 귀신과 눈이 마주치자

강아지들은 흘끔 바라보기만 할 뿐,

아는 체도 하지 않고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곳곳에서 저승사자들이

망자를 알아보는 강아지들을 단속해댔다.


귀신을 알아보고 짖는 강아지들이

간혹 있었지만 저승사자의

서슬퍼런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다시는 망자를 보고도 짖지 못했다.



귀신들은 이승에서는 이렇게

누구에게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관심받지 못하는 숱한 귀신들은

이승에서 이리저리 떠돌며

시간을 보내야했다.


대머리 귀신은

한자리에 서서 인간들을 구경했다.


인간들은 활력이 있는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은 땀에 젖기도 했고 찰랑거리기도 했다.


대머리 귀신이 살아생전

원했던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망자에게 머리카락이란 의미 없는 것이지만,

멋대로 시선이 그리로 향한 탓에

대머리 귀신은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잡히는 머리카락이 없다 보니,

긁으면 긁는 대로 시원한 맛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머리였다.


"살아있을 때야,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었지만

다 죽어서

머리카락이 있거나 말거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핏기없는 귀신의 얼굴은

시무룩한 표정 때문인지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대머리 귀신은 힘이 쭈욱 빠졌다.

인간들을 구경하는 것은 넌더리가 났다.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이었나?


살아 있을 때는 늘

시간이 부족하다 생각했건만,

죽은 자가 되니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매일 같은 날의 반복이었다.

인간들은 알아보지도 못헀고

말을 걸어도 듣지 못했다.


이승에서 귀신에게 즐거움은 없었다.


강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강물은 어디까지

흘러 갈까를 상상하며

해가 뜰 때까지 버텨보기로 했다.


대머리 귀신의 윤이 나는 머리통이 강물에 비췄다.

가로등 불빛과 만난 머리통은 반질반질 윤이 났다.




조깅하는 인간들에게 맘이 뺏겨 있던

짧은 단발머리의 귀신이

대머리 귀신 앞에 불쑥 나타났다.


강물에 비친 대머리 귀신의 모습이

단발머리 귀신의 눈에 들어왔다.

단발머리 귀신은 목이 터져라 웃어댔다.


"깔깔깔 깔깔, 얼마나 윤이 나는지

멀리서도 너만 보인다, 얘.

참기름을 발라놨나,

어쩜 그렇게 윤이 나니?

깔깔깔 깔깔!"


비아냥 거리는 웃음에도

대머리 귀신은 반응이 없었다.


몇 가닥 남지 않은 구레나룻 쪽 머리카락을

소중하게 쓰다듬어 볼에 잘 붙일 뿐이었다.


강물이 흘러가듯 대머리 귀신은

단발머리 귀신을 피해 스르르 흘러갔다.


귀신이 된지 얼마 안 된

귀신 패거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귀신들은 10여 명이 몰려다녔다.

의미 없는 기싸움을 즐기는 패거리들이었다.


인간 세상에 미련이 많아 인간처럼 싸움도 걸고

허세도 잔뜩 들어있는 귀신들이었다.



귀신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귀신일수록

인간에 대한 적대심도 크고

귀신의 허세가 어깨에 잔뜩 들어 있었다.


저승으로 빨려 들어가려면

한참을 더 뼈를 깎는 시간을 견뎌내야 할

신참내기 귀신들인 것이다.


대머리 귀신은 그들의 눈에 띌까 걱정되었다.


가로등 옆 나무 아래 웅크려

패거리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패거리들은 욕지거리를 하며

기세등등하게 가로등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패거리들은 가로등 아래에서 서로 신호를 했다.


나무 아래 웅크린 대머리 귀신의 머리가 유난히 빛나

패거리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이야. 강이 밝네 밝아."

"아니, 산책길에 달이 떴나? 깔깔깔 깔!"

"저 자식 겁이 나서 웅크리고 있었나 본데?"

"야야, 대머리를 번쩍 들라고!

그래야 눈이 부셔서 우리가 도망갈 것 아니냐고!"

"깔깔깔 깔깔! 그러게 말이야!"

"머리 들라고, 강이 아주 훤하게 말이야. 깔깔깔!"


대머리 귀신 하나를 앞에 두고

패거리들은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머리 귀신은 두려움에 달달 떨며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쥔 채

바닥 쪽으로 바짝 웅크렸다.


"아이, 씨팔. 그런데

강가에 누린내가 왜 이렇게 심하냐."


패거리들은

인간들의 냄새가 나자

코를 잡고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저기 인간들이 냄새가 독하니까

강에 냄새가 절었나 보다야.


냄새나고 한심한 인간들."


"조깅한답시고 나와서

땀을 흘려대는 인간들이 이해가 안 돼.


온 동네 똥개들도 다 끌고 나오니

곳곳에 개 소변 냄새도 진동을 하는구나!


아오 진짜 더러운 세상.

인간들은 진짜 더럽단 말이야!"



강아지들의 소변 냄새를

불평하는 귀신 근처에서


패거리들을 주시하던 강아지 귀신의 눈이

어둠을 뚫고 번뜩였다.


요크셔테리어였을 강아지 귀신은

날카로운 앞 이빨을 으르렁거렸다.

생전에도 사람을 물었던 이빨이었다.

그 이로 사람을 크게 물어 죽게하였다.


안락사하게 된 강아지 귀신은

주사 한 대로 죽게 된 원한이 깊었다.


송곳니가 길게 아래 위로 드러났다.

살기가 느껴지도록 낮게 으르렁거렸다.

살을 찢고 싶은 아랫 입술이 덜덜 떨고 있었다.


날뛰기 직전인 강아지 귀신의 모습에

욕을 하던 패거리 귀신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며

강에서 멀리 달아났다.


대머리 귀신은 머리를 감싸고 웅크리고 있었다.

강아지 귀신은

도망가지 않은 대머리 귀신에게 달려들었다.



닿지 않는 할큄, 으스러뜨릴 수 없는 이빨로

대머리귀신을 물어뜯었다.

극도로 흥분한 채

강아지 귀신이 이리저리 날뛰었다.


한참을 달려들던 강아지 귀신은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자

숨을 할딱거리며 멈추어 섰다.


"할딱, 할딱, 할딱"

거친 숨을 내쉬는

강아지 귀신의 혀가

길게 삐져나와 늘어졌다.


대머리 귀신은 머리를 들어

강아지 귀신을 쳐다보았다.



"내가 머리카락은 없지만 살아생전에

동물을 참 사랑했던 사람이야.

참 귀엽게 생겼구나.

너도 누군가에게 사랑 받았었겠지?"


윤이 나는 머리통 덕분이었을까,

강아지에게 선한 말을 해주는

대머리 귀신이 더욱 빛이 났다.


강아지 귀신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대머리 귀신에게 가까이 다가와

닿지 않는 손을 핥아댔다.



가로등 불빛은 대머리 귀신의

정수리 바로 위였고

별들은

가로등 바로 위에서

반짝거렸다.


강아지 귀신에게 닿지 않는 손을 맡긴

대머리 귀신의 머리통이

빛을 받아 함께 반짝거렸다.



강아지 귀신이 갑자기 짖기 시작했다.

"왈왈! 왈왈! 왈왈!"


까만 하늘에 가장 밝은 별 하나가 반짝.

버튼을 눌렀다 뗀 것처럼 또 반짝.


별이 반짝거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새까만 밤 하늘에 가장 밝은 별 하나가

더 더 빠르게 반짝거렸다.


그때, 빗장이 열리듯 별이 두 개로 쪼개졌다.

드디어 하늘 문이 열렸다.


대머리 귀신은 진귀한 광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눈부신 빛을 쏟아내며 갈라진 하늘문으로

대머리 귀신이 스르륵하고 빨려 올라갔다.


높이 붕 뜨는가 싶더니 스카프처럼

흐물거리며 가벼워졌다.


대머리 귀신의 얼굴은

황홀감에 미소 짓고 있었다.


청소기로 빨려가듯 스르륵

별이 열어준 하늘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공중에서 미소짓고 있던 대머리 귀신의 형상이

완전히 사라졌다.


대머리 귀신이 드디어 저승으로 간 것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강아지 귀신은

짖는 것을 멈추고 멍하게 하늘만 보았다.


대머리 귀신을 빨아들인 별은 몸집이 커지더니

무거운 몸을 견디지 못하고 추락했다.


떨어지는 길을 따라 별은 긴 실모양 꼬리를 만들었다.


산책을 하던 인간들은

밤하늘에 떨어지는 별똥별을 발견했다.


어떤 인간은 소원을 빌기도 하고

또 다른 인간은 신기한 모습을

입 벌린 채 관찰했다.


"누군가 죽은 건가 봐."

인간들이 별똥별의 의미를 해석했다.


"아니, 드디어 망자가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간 거야."


단발머리 귀신이

인간들에게 들리지도 않을 말을 중얼거렸다.


대머리 귀신을 놀려대던 단발머리 귀신은

부러운 마음에 침을 꿀꺽 삼켰다.



죽은 자의 육신을 데리고 가던 저승사자가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져 있는 강아지 귀신을

자상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저 대머리가 얼마나 반짝이고 이쁘던지

저승에서 대머리 귀신이 가장 잘 보였어.

순번대기표를 다른 귀신들보다 더 빨리 뽑은 격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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