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약 4알, 물약 10ml.
앞에 놓인 약을 노려보더니
마음을 먹은 건지
굳센 결의가 느껴지는 꽉 쥔 손으로
물그릇을 먼저 잡았다.
딸아이는 알약은 먹겠으나
물약은 못 먹겠다며 버티는 중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단호히 말해줬다.
"병이 났을 때 약이나 주사로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더 오래 아프게 되니
더 오래 아픈 책임은 본인이 지는 거야."
아픈 것보다 잔소리가 더 싫었을지 모른다.
도깨비 같은 눈을 하고
대답을 하지 않는다.
못 본 척 피해 일어났다.
알아서 물그릇을 잡아든 것을 보니
오랫동안 약을 먹을까봐 겁이 난 모양이다.
"물약 다 먹고 나면
아이스크림 한 입만 주면 안 돼?"
도깨비 같은 눈을 한 아이는 어디 가고
상냥한 목소리로 나에게 협상을 요구했다.
뒤돌아 그릇을 정리하던
나는 귀여움에 몰래 웃음이 터졌다.
웃음기 싹 뺀 얼굴로 "한 입만이다."
나의 대답에
물약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 사라졌다.
물 잔이 아니라 물약부터 단숨에 집어삼켰다.
"크읍.....!"
다시 도깨비 눈으로 변하면 골치가 아파지니
아이스크림 통에서
한 숟갈 듬뿍 퍼서 넘겨줬다.
웃는 얼굴의 벌어진 입 크기를 보니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찻숟가락이 아니라
밥숟가락 가득이라
만족스러움이 묻은 미소였다.
약을 먹고 난 뒤부터
등교 준비는 일사천리이다.
양치도, 세수도 옷 입기도 어찌나 빠른지
괜한 걱정을 했나 싶다.
'지각은 너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니다.'라고
늘 말하는 나인데
자연스레 지각을 걱정하고 있었나 보다.
한 놈 무사히 끝마치고 뒤돌아보니
욕실에서 아직 나오지 않은
전사 한 명이 뒤늦게 기억났다.
8시 40분 등교 시간이 15분 남은 시각.
하나를 무사히 내보내고
나머지 전사가 기다리는 욕실로 향했다.
아직 현장 마무리가 되지 않은 것이다.
나 자신에게 힘을 내라는 의미로
어깨를 한 번 주무르고
의미 없는 노크 두 번을 한 후
문을 열어젖혔다.
동그랗게 놀란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에헤라디야.....
여태 물기 없는 얼굴에 양치도 안한 채
거울을 보면서 춤추고 놀고 있었구나.
비데 변좌 온도 버튼도 끄지 않고
춤을 추고 있던 녀석의 귀를 당길까?
하는 강한 욕구를 애써 참아내고
눈빛으로 제압을 했다.
압도된 동그란 눈은
춤추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칫솔에 치약을 얹었다.
눈을 그대로 마주친 채로
입에 칫솔을 물었다.
'나 지금 하고 있잖아.'
눈으로 말을 잘하는 재주가 있다.
살벌한 눈빛이 종료되지 않자
"아!" 하는 소리로 이제 알았다는 듯
비데 버튼을 눌러 종료시켰다.
대충 물로 몇 번 얼굴을 비비더니
세수가 완성된 모양이다.
"히......이" 하면서 긴 미소를 만들더니
꼼꼼히 이를 확인한다.
세수로 촉촉해진 얼굴을 들이 밀어
거울에 비추더니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왔다.
두 번째 녀석의 가방에 낀
외투 모자를 빼내 주고
현관으로 밀어 보냈다.
'잘 다녀와'라는 말보다
"신발 구겨 신지 마!"가
먼저 나와버렸다.
주섬주섬 신발 뒤축을 올리더니
씩 웃으면서
"사랑해." 하고
현관문을 나선 꼬맹이.
나도 모르게 힘을 주고 있던
미간이 스르륵 풀렸다.
"내가 더 사랑해. 잘 다녀와."
두 어린이에게
농락 당한 현장에서
나만 홀로 남았다.
정적이 흐르는 집.
방과 부엌, 식탁에
또 다른 전투가 잔뜩 남았다.
아침마다 벌어지는 등교 전쟁.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맥이 탁 풀렸다.
일주일에 다섯 번 꼬박 치러야 하는 일.
순간순간 귀여운 행동에
도파민이 폭발하기도 하고
시간관념 없는 두 어린이 때문에
코르티솔이 분비되기도 하는
뻐근해진 뒷목을 주무르며 웃게되는 등교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