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일기 #013
타다다다다닥
타다닥 탁
타건음이 분주한 퇴근 10분 전의 사무실. 슬금슬금 외투의 단추를 여민다. 화면 한편에 빚을 독촉하듯 깜빡이는 사내 메신저를 모른 척 외면하고 운동화에 발을 쑤셔 넣는다. 이 순간은 영혼의 귀환을 의미한다. 자아의 회복이자 해방을 위한 예열이다. 거짓말처럼 몇 시간 후엔 멍청한 얼굴로 다시 여기에 앉아 있겠지만 이 순간의 맥박은 진짜다. 여전한 키보드 타건음이 자유의 전주곡인 듯 감미롭다.
역시 퇴근 준비는 최소 10분 전부터다. 노동이란 생명을 태워 돈으로 연성하는 행위이지만, 나는 그 돈이 충분하다 느껴 본 기억이 없으므로 내가 10분 전부터 퇴근 준비를 하는 것은 정당하다. 억지인가? 비난하라. 애초에 나는 이런 식의 적당주의자다. 원래부터 인간은 노동이 아닌 놀이를 하는 동물이라고 하위징아도 말했다. 몇 번을 칭찬해도 모자란 이 역사학자가 네덜란드 사람이었던가? 참고로 네덜란드의 노동 시간은 연간 1,400 시간 미만으로 OECD 최저 수준이다. 암만. 그게 옳지.
그러니까 직업이란 건 뭘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 기간 종사하는 일>이라고 사전은 말하지만 글쎄요,라는 읊조림이 일요일 다음 월요일처럼 따라 나온다. 아. 적성이요? 사전이란 실로 속 편한 직업이다. 현실이 어떻든 알고 있는 대로만 떠들면 그만이라니. 이 자식 그야말로 적성대로 일하고 있구나.
너나 할 것 없이 하루 동안 참은 숨을 토해 놓는 통에 버스 안은 늘 후끈하다. 통화하는 사람, 졸고 있는 사람, 수다 떠는 사람. 당최 무슨 생각으로 살고들 있나 싶은 마음에 괜스레 심통이 난다. 다들 적성에 맞게, 능력에 따라 일하고 있는 건가. 왜 일할까. 대단한 일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신이 나서 퇴근해 놓고 이게 무슨. 모처럼 얻은 자유이지만 그 자유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잊은 채 익숙한 경로에 마음을 싣는다. 아차. 시시각각 널뛰는 기분을 타이르는 건 내 또 다른 직업 중 하나이다.
소명이니 하는 말들에 제법 뜨거워지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다. 아주 어렸을 때, 나는 막연하게 문학을 하거나 혹은 음악을 하거나, 아니면 사회학을 하거나. 다시 말해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좇다 보면 완성되는 삶을 살 줄 알았다. 그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누구나 그러하듯 '알고 보니 이토록 평범한 존재였던 나'라는 인생의 반전을 어느 시점엔가 알아차렸을 뿐이고, 성실히 쌓여 가던 집안의 부채를 목도한 순간 사고가 멈추었을 뿐이다. 더불어 나는 그다지 진취적이지도, 성실하지도 못한 인간이었다. 아- 어른들이 말하던 게 이거구만. 환상의 종착역에서 내려다본 현실과 자각과 부채와 체념을 나는 묵묵히 받아들인 것 같다.
소명은 씨발! 산다는 건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잠을 자는 일이었다. 그 외에 무엇도 없다는 확신이 든다. 부자나 빈자나 똑같다. 물론 부자는 좋은 밥을 먹고 건강한 똥을 싸고 편히 잠을 자겠지. 부자였던 적이 없어 뭐가 더 있는지 모르겠으니 부자가 반박한다면 받아들이겠다.
슬슬 내가 억울하다 말하고 있는 것일까 봐 겁이 난다. 나는 정말이지 억울하지 않다. 또 이것은 변명도 아니다. 멋대로 지구를 평평하다 믿으며 살았다가 실은 둥글다는 것을 알게 된 느낌이 비슷할까. 충격적이기는 해도, 여전히 평면 위를 걷는 기분이라 해도 둥글던 지구가 평평하게 바뀌는 건 아니다. 자, 자 그만 받아들이자. 아니 이미 받아들였다니까?
아니 언제까지 달라고 얘길 해 줬어? 나한테 지랄이더라구.
그러니까! 미친 거 아님?
유난스레 벌써부터 패딩을 꺼내 입은 사람과, 응 그런 건 신경 안 써라는 듯 홑겹 셔츠 차림인 옆사람. 둘이 어깨를 부딪히며 뒤뚱뒤뚱 걷는다. 결국 대부분의 인간이, 삶이라고 말하지만 그저 생활을 해 나갈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쌍지팡이를 들고일어날 주체형 인간들이 여럿 떠오르지만 뭐? 그래서 뭐? 아무리 생각해도, 또 둘러보아도 이 생에서 완전한 자아라든가 자의라든가 부를 만한 건 찾지 못했다. 삶이 아냐. 오히려 살아짐 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무의미란 건, 말로든 개념으로든 너무 새삼스럽다. 어쩌면 시지프스 역시 죽어라 바위를 옮기면서도 실은 즐거웠는지 몰라. 이랬다 저랬다 뜻 모를 현상만을 보여 주는 신이 인간의 마음을 무슨 수로 알았겠어. 결국 나의 의지라 말하며 기를 쓰고 의미를 찾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분이겠지. 나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고장 난 인간이므로, 나를 성원하는 가족과 함께 계속 먹고, 똥을 싸고, 잠을 자고 싶어서 지금껏 노동해 왔습니다. 자아실현이니 업적이니 하는 것에는 관심 없습니다. 적성인지 아닌지, 이것이 삶인지 생활인지 몰라도 그만한 의미를 이어 가고자 오늘도 좋은 아침- 은 염병.
집 앞에 붕어빵 아저씨가 오셨다. 팥 두 개, 슈크림 두 개. 물론 현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