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되는 것과 사라지는 것 사이에서

어느 날 마주친 청춘의 기록

by 서율빈

스물다섯 무렵, 영월을 다녀온 뒤에 쓴 글을 다시 읽었다. 그 글의 제목을 나는 ‘조홍위문(弔弘暐文)’이라 붙였다. 지금 보면 과한 문장도 있고, 감정이 앞선 대목도 있다. 역사를 말하는 듯했지만, 어쩌면 그저 나 자신을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문장들은 그때의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 붙들어본 말들이었다. 무엇이 옳은지, 누구의 편에 서야 하는지, 세상은 왜 그렇게 쉽게 사람을 몰아세우는지 묻고 또 묻던 시절이었다. 그때의 나는 역사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거나,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을 믿고 있었다. 역사를 통해 도(道)를 가릴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옳고 그름은 언젠가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야만 지금의 혼란 또한 설명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를 묻고 있었다. 그 물음은 자연스레 단종과 성삼문에게로 향했다. 나는 단종을 연민했고, 성삼문을 동경했다. 그러나 끝내 그들 누구도 아닌 채로 남아야 하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느 편에도 서지 못한 채, 다만 생각만으로 뜨겁던 시간이었다. 영월의 강물은 아무 말 없이 흘러가고 있었고, 나는 그 위에 질문과 불안을 얹어두고 돌아왔다.


지금의 나는 안다. 강이 흐르듯 역사도 해석 속을 흘러가고, 사람은 그 안에서 각자의 몫만큼 살아갈 뿐이라는 것을. 결국 남는 것은 명분이 아니라, 기억되는 것과 기억되지 못하는 것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때의 문장을 지우고 싶지는 않다.
그 과함 속에, 아직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던 마음이 있었으므로.


조홍위문(弔弘暐文)


그냥 마음가는 대로 달리자고 했다. 모두들 한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아무런 부담없이 달렸다. 맑은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샛별이 반짝였다. 잠시후, 달이 떠올라 하늘을 떠다니기 시작했다. 달빛이 강물에 비쳐 반짝이고, 강의 푸른 빛은 하늘에 맞닿은채로 끊임없이 흘렀다. 어디에 멈출지 모르던 자동차는 어느새 영월에 도착하였다.

동강 어귀에서 어렴풋이 청령포가 보였다. 물 건너 외로운 섬인 청령포는 단종의 슬픈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그곳에서 단종은 사사를 명받았으나, 결국에는 자살하였다.

단종은 그 즉위부터 비극을 안고 있었다. 큰할아버지조차 정정했고, 삼촌들은 모두 늑대였다. 공자가 예찬한 주공의 덕은 사라지고, 권신들조차 선왕의 유지를 핑계로 권력을 사유화하였다. 결국 수양이 그 싸움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수양은 왕도 정치를 펼치기 위해 집현전의 학자를 중용하려 했다. 계유정난 이전부터 수양은 집현전에 관심을 보였고, 정난이 일어난 그날 밤 집현전의 숙직을 선 성삼문과 박팽년에게는 상급을 내렸다.

그러나 그 선비들은 끝내 수양을 배신했다. 1456년 6월 2일, 김질은 성삼문의 역모를 고발함으로써 공신의 반열에 그 이름을 올린다.


“네가 김질과 무슨 일을 의논했느냐?”

하니, 성삼문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참 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청컨대 김질과 면질(面質)하고서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김질에게 명하여 그와 말하게 하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삼문이 말하기를,

“다 말하지 말라.”

하고서 이어 말하기를,

“김질이 말한 것이 대체로 같지만, 그 곡절은 사실과 다릅니다.”

... 임금이 같이 공모한 자를 물었으나 성삼문은 말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나를 안 지가 가장 오래 되었고, 나도 또한 너를 대접함이 극히 후하였다. 지금 네가 비록 그 같은 일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내 이미 친히 묻는 것이니, 네가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 네 죄의 경중(輕重)도 역시 나에게 달려 있다.”
하니, 대답하기를,

“진실로 상교(上敎)와 같습니다. 신은 벌써 대죄(大罪)를 범하였으니, 어찌 감히 숨김이 있겠습니까? 신은 실상 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과 같이 공모하였습니다.” - 『조선왕조실록』세조 2년 6월 2일


한동안 하늘을 보며 탄식한 성삼문은 순순히 자백한다. 그러나 실록이 놓친 혹은 고의로 누락했을지도 모를 그 사이의 세조와 성삼문의 싸움, 그리고 그날의 피비린내나는 국문을『연려실기술』은 이렇게 전한다.


"네가 신이라 일컫지 않고 나를 나으리라고 하니, 네가 내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것은 반복이다. 겉으로는 상왕을 복위시킨다 하지마는, 실상은 네가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삼문이 말하길


"상왕이 계신데, 나으리가 어떻게 나를 신하로 삼을 수 있는가. 내가 또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만일 믿지 못하거든 나의 집을 적몰하여 따져보라. 나으리의 말은 모두 허망하여 취할 것이 없을 것이다."하였다.


세조가 극도로 노하여 무사로 하여금 쇠를 달구어 그 다리를 뚫고, 그 팔을 끊으나 얼굴빛이 변하지 않고 ... - 『연려실기술』단종조 고사본말


실록은 단종이 성삼문의 계획을 듣고 긴 칼을 내려 독려했다고 전하지만, 『연려실기술』에서는 그저 통보만 받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 사실이건 이미 창덕궁을 찾아온 백관의 하례를 받지 않았던 단종이었다. 단종은 결국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恨)하노라.

주려 주글진들 채미(採薇)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거신들 긔 뉘 따헤 낫다니. - 성삼문


고문이 남긴 고통에 떨면서도 성삼문은 난세에 눈돌리고 은거한 이제(夷齊:백이와 숙제)보다 자신의 처지가 더 나음에 자부심을 가졌다. 그럼에도 동시에 남겨진 옛 동료들을 향해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서 태평을 이룩하라. 삼문은 돌아가 옛 임금을 지하에서 뵙겠다."라는 말을 남겼다.


상고시대부터 수천년간, 무엇이 도이고 무엇이 옳은 것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나누어졌지만, 거기에 대해서 끝내 누구도 정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반정 후 600년이 지난 지금도, 성삼문과 수양에 대해 누구도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 성삼문도 도를 바로잡기위해 일을 꾸몄고, 수양 또한 도를 이루기위해 칼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그 혼란속에서 그저 필부로 살아갔으면 좋았을 한 소년이 끝내 쓸쓸히 죽어갔다는 것이다.


어둠속에서 동강은 만리타향서 고향을 그리며 죽어간 한 소년의 슬픔을 품고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그 슬픔의 무게에 짓눌려 어느새 동녘이 밝아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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