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말보다 오래 남는다
어떤 말은 그냥 지나가는데,어떤 말은 마음속에 깊이 박혀, 오래도록 나를 괴롭힌다.
그 말이 정당해서가 아니라, 그 말을 들었던 그 순간의 내가 너무 약했기 때문이었다는걸 이제 알게됐다.
나는 43살이다.
엄마이고, 주부이며, 직장인이면서,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 또 며느리다.
이 많은 이름을 부여받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나’를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결혼 14년 차. 남편 쪽에서 마련한 집에 나는 살림을 보탰고, 아이를 키웠고, 눈치까지 보며 살았다.
살던 집은 오래된 아파트였다.
창틀로 비가 새고, 곰팡이가 피었고, 화장실은 고쳐야 했다.
아랫집에 물이새는 바람에 화장실을 고치게되었는데 “공사비를 깎으라”는 시어머니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인테리어업체에 내돈을 조금보태서 마무리하는걸로 했었다.
둘째를 임신하고 이사하며 싱크대 교체 하나도 허락없이 쉽사리 하지못하는 내가 돈앞에 또 무력감을 느꼈다. 친정엄마가 해주시기로 했다고 하면서 말씀드리는데 “니네 엄마 돈은 돈이고, 내가 주는 건 뭐냐”는 그 말에 나는 또 무너졌다.
그 말 한마디가 내 존재를 너무 쉽게 무너뜨렸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은 뼛속까지 사무친다.
그때 나는 엄마로서도, 아내로서도, 사람으로서도
존중받지 못했다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지금까지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동서가 생긴 후 모든 비교는 더 노골적이었다.
신혼집 인테리어, 신혼여행 중 수리, 에어컨 설치까지. 그 집엔 아낌없이 쏟아지는 배려가
왜 내게는 없었을까? 그러면서 또 나는 나를. 나의 배경을. 나의 환경을.. 거기에서 이유를 찾으려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일을 시작했다.
경제력을 갖고 싶었고, ‘밖에서 나를 살아내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조금은 살 것 같았고, 더 이상 움츠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도…
삶 속에서는 여전히 감정의 스크래치가 반복됐다.
지난 설날이었다.
1월 1일, 새해의 첫날.
온 가족이 시댁에 모였고, 나도 아이들과 함께 갔다.
떡국을 먹고, 인사를 나누는 평범한 자리였다.
그런데 그날, 시어머니는 갑자기 자동차 리플릿을 꺼내 드셨다.
5천만 원짜리 신차.
“시동생 앞으로 구입할 거다” 하시며
그 차가 몇 인승이고, 아버지 명의는 어쩌고저쩌고…
한참을 설명하셨다.
나는 그냥, 진짜 아무 의도 없이 말했다.
“아, 우리도 차 바꿀까 고민했는데요.”
그 한마디에 분위기는 돌처럼 무거워졌다.
정말, 무슨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과거에 내가 중고차 한 대를 샀을때도 나는 잔소리에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었다.
“니가 일을 한다고 그렇게 빨리 차를 살 줄은 몰랐지.”
“차 유지비는 어쩌려고 그러냐.”
나는 그 잔소리를 알면서도, 불편한 우리 아이들을 위해 지인을 통해 중고차 한 대를
내 힘으로 샀다.
그때의 말들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주는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게 쏟아지는 배려가, 왜 나에겐
늘 따진 끝에나 조금씩 허락되는 걸까.
비슷하게 헤져가는 우리 차.
그저 바꿔야겠다고,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시어머니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소리치며 말했다.
“니가 뭔데 그런 말을 해?”
“너는 그 입이 문제야.”
모두가 있는 자리였다.
남편도, 동서도, 시동생도.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숨이 턱 막혔다.
싸웠다. 기분나쁘다는 말도 했다. 그랬는데 결국 그냥…그렇게 끝이났다.
그날 이후, 나는 말을 줄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과 감정을 나누는 걸 포기했다.
나는 늘 누군가를 편하게 해주려 애썼다.
말을 돌려 말하고, 눈치를 보고, 상대의 표정을 먼저 살폈다.
그런데 정작 나는?
나의 감정은?
누가 돌봐줬을까?
아무도 몰라줬다. 그리고 나도 몰랐다. 나조차 나를 위로하지 못했으니까.뒤늦게 깨달았다.
그 순간의 내가 단호하지 못했던 건 어릴 적부터 감정을 미뤄두고 살아온 습관 때문이었다는 걸.
‘말 한마디에 왜 이렇게 상처를 받지?’
‘왜 나는 저 말에 괜히 자존심이 상하지?’
그런 날들이 많았다.
지금은 안다. 그 말들이 날 아프게 했던 건 말이 문제가 아니라
그 말에 대처할 준비가 안 된 나 때문이었다는걸...
이제는 다짐한다.
누구의 말에도 휘둘리지 않겠다고.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반드시 나의 편이 되어주겠다고.
그리고 흘려보내기로 했다.
기억도, 감정도, 그 말들도.
더는 붙잡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