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밥상
술에 담긴 외로움, 품게 해주고 싶었던 인간다움.
기억이 존재하던 나이부터 술심부름을 다녔다. 어두운 밤 손에 지폐를 한 장 쥐고 아파트 입구 가게에서 소주 한 병을 사면 동전 몇 개가 거슬러졌고 잔돈은 늘 내 차지였다. 그래서였나? 술심부름은 하고 싶은 일이었고 칭찬도 받는 좋은 일이었다.
소주를 사들고 집에 들어서면 아빠는 TV앞 작은 밥상에 찬 몇 가지와 투명한 소주잔을 놓고 기다렸다. 국이나 찌개 때로는 나물 몇 가지만 있기도 했던 밥상엔 항시 밥대신 소주가 있었다. 우리와 같은 저녁찬에 밥이 없는 밥상, 소주가 밥인 밥상. "소주가 밥이야, 밥"이라는 아빠의 말을 당연하고도 순수하게 믿어서인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나는 진심으로 세상의 모든 아빠들은 '밥' 대신 '소주'를 마신다 생각했다.
TV가 친구, 사이좋은 와이프라도 되는 것처럼 아빠는 그 시간을 좋아했다. 때론 웃고 덤덤하며 매일 반복되는 시간을 늘 가졌다. 어린 눈에 소주가 있는 밥상은 아빠의 즐거움으로 보였다.
대학에 들어가 처음으로 소주를 마시고 깜짝 놀랐던 날을 기억한다. 신입생이 되어 같은 과 4학년과 대면식을 하던 날 아빠의 밥상에 늘 올라있던 에메랄드 빛 소주를 처음으로 마셨다. 설탕을 폭포처럼 들이부어 녹인 듯한 맛, 너무 달아서 달다 못해 쓴 맛이 나던 소주. 그런 소주를 대학생활 내내, 20대 날들에 참 많이 마셨다. 친구가 좋았고 술자리가 주는 즐거움이 좋았다. 그러면서도 한 번씩 '아빠는 어떻게 매일밤 술을 마셨지? 그것도 혼자서...' 생각했다. 술이 아무리 좋아도 마시고 나면 힘든 것이고 주고받는 것이 없는 술은 재미가 없는데.
25살, 어느 늦은 밤 나에게 저녁밥상을 차렸다. 찬 몇 가지에 소주 한 병 그리고 TV. 아빠가 일으킨 금전적 사고로 언니와 둘이 작은방을 얻어 막 독립을 했던 시기였다. 언니는 사고 뒷수습에 바빴고 난 일상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에 바빴다. 밥도 차려먹기 싫어서, 깊이 생각하면 힘들어서 술을 마시면 좀 잊을까 싶어 차려놓고 보니 어딘가 친숙한 모습이었다. 아빠와 같은 모습, 오묘했다. 한 잔 한 잔 술이 들어가면서 아빠가 느껴졌다. 즐거움이 있을 듯했는데 무덤덤했고 때로 가라앉았다. 하루의 고됨을 씻어내는 개운함보다 이마저도 없었으면 어쩌나 싶은, 끝자락에 서있는 외로움이 있었다.
'이거였구나... 매일 밤 아빠는 외로움을 담았구나.'
아빠가 69세가 되던 해 우리는 합가 했다. 2년여의 추적관찰 끝에 아빠는 '파킨슨' 확진을 받았고 남편은 함께 살자 제안했다.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었고 정성으로 잘할 자신도 없었지만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의 인간다움'.
나눌 가족보다 떠 앉은 책임이 컸던 자리, 좋았던 날도 휘청이던 날도 홀로 흥이 나고 일으켰을 날 들, 그런 시간이 가져온 외로움. 그것을 단 몇 년 만이라도 잊게 하고 싶었다. 같이 둘러앉은 식탁에서 밥을 나눠 먹고 웃고 우는 아이들 소리와 살갑지 못해도 주고받는 이야기가 있는 북적 거림, '사람다운, 인간다운' 시간을 남겨 드리고 싶었다.
열 손가락 못 미치게 남아있는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고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빠는 살 만했던 삶이었을까? 몇 해 동안 사람 사는 것 같았을까? '잘했다'라고 내세워 말하진 못하겠다. 그저 바라건대 함께한 7년의 세월 동안 수많았던 저녁밥상에 아빠의 외로움이 조금 옅어졌기를... 아빠도 따듯한 밥을 함께 먹으며 '가족'을 가졌다는 것을 가슴에 품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