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필요 없어
만삭의 배를 끌어안고 숨을 내쉬며 그녀가 말했다.
"여자가 이렇게 열 달 배에 품고 애를 낳으면 솔직히 젖 정도는 남편한테서 나와야 공평한 거 아냐?"
지인의 말을 웃어넘겼지만, 출산 후 지옥의 젖몸살을 겪고 저 말에 공감하게 되었다.
입덧도 그리 심하지 않았고 살도 막달까지 10킬로가 채 찌지 않은 나로선 임신 체질이냐 싶을 만큼 무탈한 임신 기간이었다. 얼마큼 아플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알 수 없는 진통을 피하기 위해 제왕절개 수술 날짜를 미리 잡아 출산했기에 사실 아프지 않았다. 수술 후에는 칼로 배를 찢었는데 이 정도도 아프지 않겠냐, 감수하고 아플 때마다 진통제를 추가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고통은 바로 부풀어 오르는 가슴, 차오르는 젖이었다! 시간마다 짜주지 않으면 열이 오르고 불어터질까 고통스러웠다. 불 타오르듯 화한 아랫배의 상처 부위와 약빨이 돌려면 좀 푹 자고 싶은데 자리에서 일어나 앞섶을 풀어헤치고 유축기로 젖을 짜내야 하다니. 샤워 후 몸을 수건으로 가리고 나오던 내외 따위는 집어치우고 상의 탈의 후 남편에게 가슴을 주무르라고 소리쳤다. 조물주도 무심하시다. 정말 남자가 젖 정도는 먹이도록 고통 분담을 좀 해주시지.
둘째 생각은 1도 없지만, 임신과 출산에 대한 두려움이 이유라기보단 지독한 젖몸살 때문에 치가 떨려서다. 엄마만 아기 배를 채워줄 수 있는 모유 수유는 포기하고, 분유를 선택해 가족 중 아무나 먹일 수 있도록 했다. 친정에서 몸조리를 하고, 몇 달간 키우면서 나의 선택에 만족했다. 남편은 유럽에서 한국을 오가며 아이를 한 번씩 보고 가곤 했다. 정말 말 그대로 "보기만" 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현재, 그때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남편은 서운할지 몰라도 친정에서 아이를 키운 게 여러모로 다행이었단 생각이 든다. 아이 낳고 많이 싸운다던데 우린 부딪히지 않으니 갈등도 없었다. 육아 전문가 친정엄마의 품에서 나도 엄마 밥을 먹으며 몸을 회복하고 때때로 아이를 맡기고 놀러 나가는 자유를 누렸다. 엄마가 텃밭에서 키운 무공해 채소와 시장에서 공수해온 싱싱한 과일과 생선으로 만든 이유식으로 아이는 포동포동 살이 올랐다. 내가 친구들과 여행을 떠날 수 있던 것도, 내가 없어도 아이를 데리고 문화센터 수업에 참석해 개근상을 받은 것도 모두 엄마 덕분이다. 이렇게 친정엄마만큼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존재가 있을까. 그 시절 내가 비빌 수 있는 언덕은 남편보단 엄마였다.
이렇게 안온하고 아늑했던 친정엄마 품을 떠나 유럽에 와서 혼자 육아를 시작하니 너무 힘들어 3일을 울며 잠들었다. 몇 달 비웠던 집은 우리가 오기 전 남편이 치운다고 치웠으나 내 기준에는 엉망이었다. 짐 정리와 동시에 청소로 바빴지만 아이는 바뀐 환경에 낯선지 내게만 매달렸다. 남편이 출근한 후 아이와 단둘이 하루를 보내며 한국으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했다. 그 시절 나는 유아차에 아이와 짐을 싣고 무조건 밖으로 나가 쇼핑몰과 공원을 쏘다녔다. 남편은 아이가 잠들 무렵에 퇴근했고, 나는 육아 퇴근 후 시간을 즐길 새도 없이 캄캄한 방에서 아이 옆에 누워 순장 체험을 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후 겨우 얻게 된 낮 시간의 자유를 누리며 그때를 돌아보면 어른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지 못하던, 오롯이 혼자라는 우울감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남편은 아침 일찍 출근해 저녁에 퇴근하고, 때론 야근과 회식도 해서 아이 얼굴을 보는 시간이 짧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하원 후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주중 육아는 오롯이 내 몫이다. 한국 엄마는 대부분 그럴 것이다. 나의 컨디션이 좋으면 아이가 커가는 이 순간을 아빠는 일하느라 함께할 수 없음에 안타깝고 내 기분이나 몸 상태가 별로면 '독박' 육아에 입이 나온다. 어린이집 쉬는 날, 기분전환을 위해 떠난 여행지에서 남편은 아이를 안거나 무동을 태우는 등 내내 아이를 케어했다. 역시 육아는 힘이 있는 남자가 해야 한다. 다정한 성격의 남편은 육아의 노고도 위로할 줄 알고, 내 육아 방식에 전적으로 따르는 편이다. 감정 기복이 큰 나와 달리 늘 한결같고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는 남편이 아이를 더 잘 돌보는 듯하다. 다만 그는 시간이 없을 뿐.
아이가 잠든 후 남편과 맥주 한 잔을 기울일 여유가 생긴 어느 밤, 아이에 관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가 웃으며 말했다. "여보한테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남편은 육아에 필요 없는 거 같아."
남편은 웬일로 내 말에 바로 반박했다. "아니지. 아빠는 있으면 필요 없고, 없으면 필요해."
와. 너무 맞는 말. 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