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의 불행과 51의 행복
왜 자꾸 어린이집이 쉬는 거야!
이놈의 유럽 어린이집은 쉬는 날이 잦다. 공휴일과 겹쳐 수목금토일 아이와 5일 내내 붙어 있자 나는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수영장, 키즈카페에 데려가고 매일매일 집 앞 공원을 나가 놀면서 삼시세끼 밥을 해먹인 대단한 나. 토요일 아침에 남편이 내게 말했다.
"여보, 오늘 나가서 좀 쉬다 올래? 컨디션이 확 떨어져 보이네."
말이라도 고마웠다. 하지만 남편 역시 휴일이 껴 있음에도 주중에 내내 출근했던 터라 혼자 애 보라고 맡기기 미안했고 내겐 빛과 소금 같은 월요일이 다가올 테니 괜찮다고 사양했다.
타지에서 병원에 다니는 것만큼 불안한 일도 없는데, 아이가 크게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 다행이다. 밥도 간식도 잘 먹고 유아 스쿠터, 밸런스바이크를 잘 타고 놀고 밖에 나가면 독립적으로 잘 놀아서 키우기 수월해. 기질이 순한 편이라 떼쓰며 드러눕거나 천방지축으로 행동하지 않아 덜 힘드네. 뜨거운 햇살 아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잔디밭을 뛰노는 아이를 바라보는 순간을 무려 완벽한 행복이라 여기기도 했다. 어쩐지 요즘 이렇게 살 만하다 했더니 그건 아이가 어린이집을 빠지지 않고 가서였다. 5일의 강행군 속에 이따금 생각했다. 어린이집에 안 보낼 때 나 얘 어떻게 24시간 주 7일 데리고 키웠지? 스스로가 안쓰럽고 대견했다. 나라는 엄마는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와 얼마간 떨어져 있어야 매사에 감사, 모성애가 차오르는 인간이다.
원래 아이를 좋아하고 손주 사진과 동영상을 몇 번이고 반복해 본다는 친정엄마는 아이가 있어 행복하지 않냐고 물었다. 심드렁한 딸이자 엄마인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응, 이제는 불행이 49 정도고 행복이 51은 되는 거 같아. 친정엄마는 행복이 99가 아니라는 점에 놀랐다. 솔직히 신생아 시기엔 행복은커녕 호르몬의 노예로 대체로 갑갑하고 불안하고 우울했고 돌 무렵만 해도 내 아이가 예쁜지도 몰랐다. 아이가 할 줄 아는 단어가 늘어나고 울음의 빈도가 줄어들면서 뭔가 상호작용이 된다 싶으니 조금씩 사람같이 느껴졌다. 전혀 낯을 가리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잘 사귀는 성격이지만 막상 내 아이와는 친해지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손주를 물고 빠는 친정엄마와 조카를 예뻐하는 동생을 보면서 내가 아이에게 가진 애정은 저만큼은 아닌데 하는 일말의 자책감도 들었다. 모든 엄마가 아이를 예뻐하는 게 당연한 일인듯 '아이 사랑 나라 사랑' 분위기도 거부감이 들었다. 아이? 예쁘지, 예쁜데 잘 때 제일 예뻐. 사람이 저마다 다르듯 나처럼 더디게 엄마라는 역할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는 건데 말이다.
"모성애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이는 엄마를 사랑해줘." 육아가 이렇게 힘든데 둘째는 어떻게 가졌냐는 질문에 아는 언니가 해준 말이다. 생존 본능의 일종이겠지만 정말로 아이는 엄마 없이는 살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엄마를 사랑한다. 울음으로 필요를 표현하던 시기를 지나 이제 엄마 엄마 하고 불러 찾아댄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나는 그런 사랑이 부담스러웠다. 거리가 아름다움을 만든다는 중국어 표현처럼 모든 인간관계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하는데, 그건 내 아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내게 종속된 듯 먹고 싸고 자는 모든 걸 해주고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버거웠다. 그런 시기도 지나 아이가 자기표현이 늘고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늘어나는 요즘 아이는 독립된 인격체로, 친해질 만한 객체로 다가오고 있다. 5일간 아이와 붙어 있다 보니 사다리도 성큼성큼 오르고 혼자 숟가락질을 하며 밥을 퍼먹는 등 아이가 자란 것이 눈에 보였다. 아이의 성장과 나의 늙음은 동시 진행 중이라 나의 피로도 쉽게 풀리지 않았을 뿐.
다른 건 몰라도 아이가 내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건 잘 받아들일 자신이 있다. 모든 육아의 목적은 자녀의 독립이라는 말은 옳다. 자녀가 제 한 몸 스스로 가꾸고 홀로 우뚝 설 수 있도록 부모 역시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낳고 한동안 나는 자신을 내려놓고 육아에 집중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 같다. 임신과 출산으로 몸이 변하듯 출산 후 호르몬으로 멘탈도 약해지면서 엄마라는 정체성이 나를 집어삼킨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나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엄마로서의 나라는 페르소나가 하나 더 생긴 거고, 육아라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생일대의 이벤트 속에서 내 인격의 바닥도 찍어보고 나와 닮은 듯 다른 아이를 거울 삼아 나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모든 걸 아이에게 맞추고 나를 갈아넣어 육아에 헌신하면 반드시 보상심리가 생길 테다. 물론 나 같은 인간은 자식을 위해 희생할 깜냥도 안 되지만 말이다. 나 혼자 살아내기도 벅찬 세상이다. 이렇게 아이와 심리적 거리를 두고 열과 성을 다해 키우지 않는 데도 육아는 힘들다. 제 아무리 순한 아이라 할지라도 애는 애다. 오죽하면 온 마을이 나서 아이를 키운다고 할까. 둘째 얘기를 슬며시 꺼내는 인생 참견러가 누구는 쌍둥이도 키우고 연년생도 키우고 한다지만 그건 그 사람이고. 나는 힘들다고. 난 하나도 겨우 키우고 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