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엄마가 있다.
아이를 품고 들었던 생각이 있다. 나는 엄마 같은 엄마는 되지 못할 거 같아.
나의 엄마는 자식을 위해 산 분이다. 엄마는 내게 말했다. 너희를 최고로 키웠다곤 못해도 최선은 다했어.
그랬다. 엄마는 우리에게 최선을 다했다. 내가 엄마의 사랑을 체감한 건 다름 아닌 천 생리대였다. 생리를 시작한 후 엄마는 밖에선 일회용 생리대를 쓰더라도 집에서는 기저귀 천으로 생리대를 쓰라고 했다. 아무래도 천이 피부에 더 좋다고. 엄마의 엄마, 외할머니도 천으로 생리대를 만들어주셨노라고. 어렸을 때는 몰랐다. 한 달에 한 번, 일주일가량 깨끗하고 하얀 천 생리대를 쓰려면 누군가는 그걸 씻고 삶고 말린 후 반듯하게 접어둬야 한다는 걸. 여성이라면 모두 알 테다. 비릿한 혈이 묻은 생리대를 처리하는 일의 비위 상함과 귀찮음을.
내가 집을 떠나 자취를 시작하면서 엄마는 늘 아이스박스에 각종 밑반찬과 김치, 직접 빚은 손만두, 한 그릇 크기로 얼린 국까지 바리바리 싸서 보냈다. 자취방 냉장고는 고향 집 냉장고의 번외 편이었다. 우연히 자취방에 놀러온 친구가 고향에서 엄마가 보내준 풍성한 먹거리를 부러워했다. 거리가 멀어 자주 오진 못했지만 한 번씩 엄마가 오면 고무장갑을 끼고 구석구석 청소를 했다. 손이 빠르고 깔끔한 엄마는 두 집 살림을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엄마를 말리며 딸 집에 와서도 또 집안일하냐며 볼멘소리를 했다. 놀랍게도 그때까지 엄마는 주부가 아니라 일을 하며 맞벌이를 하는 중이었다.
경제적으로 유복하진 않았지만 엄마는 욕심 많은 딸을 부족함 없이 키워냈다. 나는 그런 엄마의 사랑을 먹고 노동으로 뒷받침받으며 자랐으면서도 한편으론 많은 딸들이 그렇듯 엄마처럼 살기 싫었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엄마 인생은 없이 자식만 보는 삶이었다. 자신보다 아이들이 우선한 삶, 아이에게 함몰된 인생이 싫었다. 지금껏 인생의, 아니 세상의 중심에 자리했던 '나'를 내려놓고 아이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 같았다. 엄마처럼 나를 희생하며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이기적인 나는 아무래도 엄마 같은 엄마는 되지 못할 거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산후 우울증이 엄마에 대한 미안함으로 왔다. 젊었을 때는 나를 키우느라 몸을 갈아넣고 나이 들어서는 자식의 자식을 키워내느라 엄마의 몸을 갉아먹고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하면 전적으로 아이는 내가 보면 되는데 몸이 힘들고 무엇보다 졸리고 깨 있을 때는 나가서 놀고만 싶고 나가면 엄마한테 미안했다. 돌이켜보면 호르몬의 작용으로 더 엄마에 대한 감성이 폭발했던 시기였던 듯하다.
돌 전 아이를 데리고 나는 유럽으로 돌아왔다. 도착 후 전화를 드리니 엄마는 눈물 바람이었다. 시차 적응과 집 정리도 버거운데 환경이 바뀌어 아이가 내게만 매달리자 체력과 멘탈에 한계가 왔다. 너무 힘들어 3일 밤을 울면서 잠들었다. 아이에게 할머니를 보여주려 영상통화를 하다가 말 끝에 울며 잠든다고 했다. 별생각 없이 한 말인데 그날 새벽 엄마는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딸, 너무 힘들면 돌아와. 네가 너무 힘든 거 같아 마음이 안 좋네." 시간이 지나고 적응하면 괜찮아질 텐데 괜한 말을 해서 엄마를 걱정시켰다.
시간이 지나 부모님이 여행 차 유럽으로 오셨을 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가 우울증 걸릴까 봐 걱정했어. 너 같이 자유로운 영혼이 아이에게 매여서..."라며 말끝을 흐리며 눈물을 흘렸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눈물에 당황했다. 어, 엄마 나의 자유 의지가 그 정돈 아니야.
요즘 엄마는 손주 사진과 동영상을 보는 낙으로 산다고 한다. 연달아 같은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는 엄마를 향해 내 동생이 "엄마는 **이가 그렇게 좋으셔?"라고 놀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이가 순해서 내 딸 덜 힘들게 해서 더 예쁘다고 말한다. 유럽 여행을 와서도 엄마는 포대기로 아이를 들쳐 업고 딸이 좀더 쉬도록 했다. 딸에 대한 사랑이 흘러넘쳐 손주까지 내리사랑으로 이어지는 가보다. 여전히 나는 엄마 같은 엄마가 아닌 나만의 엄마상을 모색하고 있다. 엄마의 사랑을 참고하면서. 내가 받은 엄마의 사랑이 깊고 지극해서, 따라 할 만한 애정의 레퍼런스가 많음에 감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