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쓰다.
누구나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한 번쯤 고민해볼 것이다. 모든 인간이 결국 죽게 된다면, 우리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들은 애초에 다 의미가 없는 것 아닐까? 삶의 무의미함과 이로 인한 회의주의는 인간에게 있어서 삶을 이어가려는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세상에는 아직도 많은 부조리가 있고,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난 회의주의는 남아있는 삶을 살아가야 할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넘어야 할 허들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모든 것이 무의미하며 허무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다음의 두 가지 방법으로 대처할 것이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거나, 모든 것에 반항하며 살아가거나.
카뮈는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는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잠깐 실존주의에 대한 사르트르의 설명을 빌리자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의자의 비유를 찾을 수 있다. 의자는 누군가가 앉기 위해 만들어지므로 의자의 본질은 '앉기'이다. 그래서 앉을 수 없게 만들어진 의자는 의자가 아니다. 또 의자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공장에 있는 나무 상자들도 '의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의자의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의자와는 달리 본질이 결정되지 않았으며, 어느 하나에 고정된 것도 아니다. 만약 어떤 인간을 설명하려면 그가 살아온 삶을 살펴봐야 할 텐데, 이는 인간의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증거이다. 이런 실존주의에 대한 사르트르의 설명은 과거 이를 설명한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신의 존재 유무를 가정하지 않아 '무신론적 실존주의'라고 분류된다. 흥미로운 점은, 문단의 평가와는 다르게 카뮈는 스스로를 실존주의자가 아닌 '부조리 주의자'라고 칭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 소개할 '이방인'에서 나는 실존주의에 대한 아이디어가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에서는 인간의 실존보다 본질을 우선으로 생각한 다른 인간들이, 누구보다 실존을 우선시하는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게 되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방인을 처음 읽은 독자들은 아마 모두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뫼르소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인가? 소설의 첫 문장은 너무나도 유명해져서 이제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뫼르소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그는 감정적인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여자 친구와 함께 바다로 수영을 하러 가거나, 직장 동료들의 위로에도 시답지 않은 반응을 보인다. 이렇게 소설 밖에서 일어난 첫 번째 죽음과 이에 대한 뫼르소의 대응은 두 번째 죽음인 아랍인 살해 사건에 대한 양형의 근거로 이어진다. 그는 바닷가에서 자신을 쫓아온 아랍인에게 총을 쏘아 살해한다. 그리고 이후 열린 재판에서, 그가 받은 형벌의 양은 첫 번째 장에서 발생했던 사건들을 근거로 삼아 확정된다.
나는 1장에서는 어머니의 죽음과 그 이후에 전개되는 사건들 속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의 대사들이 2장의 재판과 상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역자의 해설에 따르면 뫼르소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이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말을 건네지만, 그는 대부분 침묵이나 거의 말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꾸한다. 하지만 해설의 말마따나, 그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든 뫼르소는 결국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외적 정황을 자신의 심경이 반사되는 거울'인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2장에서 재판이 시작되고, 마침내 판사는 사형을 선고한다. 재판 내내 그를 기소한 검사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슬픈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으며, 심지어 며칠 지나지 않아 여자 친구와 함께 해수욕을 하기까지 한 사실을 근거로 들어 뫼르소가 사회의 율법에 어울리지 않는 범죄자임을 강조했다. 변호사는 감형을 위해 말을 맞춰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뫼르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교도소에 들어간 그는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인 신부와의 대화가 나온다. 여기서 그동안 주장이 아닌 대답만 해오던 뫼르소는 처음으로 자신에 대해 말한다.
... 그러나 그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한 가치도 없어.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그에게는 없지 않으냐? 보기에는 내가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인간은 모두 죽을 운명이다. 그런 사실에 비추어 봤을 때 우리 모두는 사형수와 다를 바 없는 운명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명암은, 인생 속에서 서로가 가까워질수록 더 뚜렷해진다. 죽음이라는 어두운 배경 속에서 삶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죽음으로 향하는 필연적인 인생 속에서 자살은 그 모든 과정의 광채를 잃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앞두게 된 뫼르소는 엄마의 생애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엄마가 왜 약혼자를 만들고 다시 시작해보려 했는지에 대해 이해하게 된 그는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엄마에 대해 처음부터 관심이 없던 것이 아니라 그 방향이 남들과 달랐던 것뿐인 뫼르소는, 마지막 순간에서 엄마를 생각하며 삶의 광채와 지속의 이유를 찾는다.
카뮈는 스스로를 실존주의자가 아니며, 오히려 자신은 부조리 주의이고 작품은 실존주의의 끝에서 시작한다고 밝혔다.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기존의 주장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는 말일까?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가 인간의 본질을 함부로 규정하려는 모든 타인들과 관습들 같은 것에 저항하는 일을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하려 한 것 같다. '이방인' 속에서는 타인을 향한 관심의 정의가 남들과는 다른 뫼르소 같은 인물이 나타난다. 또 이를 이해하지 못해 종교적인 강요나 이상한 논리를 들어 재판을 이어가는 판사와 검사 같은 인물도 있다. 소설 속 재판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살인을 저지른 그가 벌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유념에 두더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증언하기를 거부하는 뫼르소가 답답하게 느껴지며, 동시에 사건의 논점을 흐리는 주장을 하는 검사와 판사가 이상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상황 설정들이 오히려 작가가 의도하는 주제를 더 강렬하게 표현한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 속 이런 장면들은 뫼르소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말하는 것을 거부하고 진실을 추구하며 모든 관습으로부터 저항하는 '이방인'임을 말하고 있으며, 그는 그렇기에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부조리로부터 오는 일종의 '저주'를 거리낌 없이 온몸으로 받아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아마 이런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카뮈의 부조리 철학과 실존주의는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나타나 있고, 이방인은 그런 작품 세계의 중심에 위치한 소설이다. 난 작중에서 나오는 인물과 사건, 관계들과 소품에 따른 해석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만큼 카뮈에 대한 잘못된 시선이 남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다음에 포스팅할 카뮈의 또 다른 작품인 '시지프 신화'에서 더 공부해보기로 했다. 역시 카뮈의 작품에 대해 가장 권위 있는 연구자인 김화영 교수가 역자로 참여한 이 소설에서 그의 부조리에 대한 생각을 좀 더 배울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면서 포스팅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