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읽고 쓰다.
이 책에 대해서라면 날 잡고 이야기해도 밤을 새울 정도로 이야깃거리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고등학교 때 공부하기 싫어서 도서관에서 아무거나 집어 든 첫 책이 이 소설이었기 때문이고, 대학교에 와서도 몇 번씩이나 재독 했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유명한 작가였지만, 그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1Q84’가 아닌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그래서 하루키가 이런 현실감 있는 소설이 아닌 판타지 류의 소설을 더 많이 쓴다는 사실에 나는 아직도 이질감을 느끼고 있다.
소설 속에서는 여러 사건을 토대로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생각할 거리를 독자들에게 던져준다. 죽음과 삶의 차이, 사랑의 방식,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뒤틀림이라는 것은 한 번쯤 고민해보지만 답은 속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 주제들이기 때문에 친숙하지만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내가 와타나베였다면? 혹은 내가 기즈키나 나오코였다면? 나가사와가 와타나베와 헤어지면서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이런 식의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졌다.
애초부터 이것은 이것이다, 혹은 알고 보니 이것이었다. 이런 식의 해답을 내놓을 수 없는 물음들이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쓴 후기를 읽어보고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했지만, 다들 인상 깊게 읽었다는 부분들이 달라서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인상 깊었던 두 가지 포인트를 중심으로 두고 써 내려가려고 한다. 언젠가 어떤 리뷰어가 이 책이 경험에 따라 느끼는 부분들이 다 다르다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아직 인생 경험이 많다고 자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나이를 먹었고, 그래서 내가 다루려는 주제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많을 것이라고 느꼈다. 아마 난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같은 책의 독서록을 쓸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포인트는 인간의 뒤틀림이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 중에 완전하고 완벽한 인간이 존재할까?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말처럼, 철인이라는 것은 존재할까?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제각기의 뒤틀림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을 알고 사느냐, 모르고 사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언니의 자살을 눈 앞에서 지켜보고, 가장 사랑하던 연인인 기즈키를 역시 자살로 인해 잃은 나오코는 어릴 적부터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잃은 그녀의 인생은 얼마나 허무로 가득 차 있었을지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죽음으로 인한 회의감이나 혼란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오코의 경우 ‘죽음’이라는 것에서 오는 어둠이 그녀의 인생 기저에 깔려있다. 아마 그 어둠은 그녀를 지탱해주는 가장 큰 지지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 말고는 무의미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뒤틀림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 그 일은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 과정에 너무 빠지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 털어내야 할 것은 물론 다 털어내야 한다. 하지만 자기 연민에 사로잡히면 위험하다. 자기 연민은 스스로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새 무너지게 된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들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오코는 자신의 심연 속으로 들어갔다. 나가사와가 말한 ‘자신을 동정하지 말라’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 걸까?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상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이란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존재는 결국 자신뿐이다. 습관적이고 충동적인 우울은 당신의 입 속으로 총구를 들이밀고 언제나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시대의 감성에 관한 것이다. 20대의 대학생 와타나베는 도쿄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다. 신주쿠 거리를 걷다가 서점에 들어가서 책을 사 읽기도 하고, 미도리와 함께 바에 들어가 칵테일을 마시기도 한다. 지금은 보기 힘든 LP판을 파는 가게에서 알바를 하면서 재즈를 듣고, 가끔씩 좋아하는 재즈 앨범을 사서 선물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훌쩍 신칸센을 타고 여행을 떠난다. 이동진 평론가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평가하면서 ‘지나온 적 없는 어제의 세계들에 대한 근원적 노스탤지어’라는 말을 했다. 이게 과연 이 영화에만 적용되는 것일까?
하루키는 이 책 내내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너의 20대는 어떻게 지나가고 있니?’라고 말이다. 20대의 대학생으로 살아가는 나는 와타나베의 일상과 얼마만큼의 교집합이 있을지 따져보았다. 책을 읽는 일이 최근 많아졌고, LP판은 아니지만 유튜브로 음악을 들으면서 동네 주변을 산책한다. 금요일마다 나만을 위한 캔맥주와 안주를 차리는 일도 소소한 행복 중 하나다. ‘노스탤지어’, 우리말로 하면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나 향수’라는 뜻의 이 단어는 말 그대로 과거를 추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금 세대는 1970년대의 일본이나 우리 부모님 세대가 대학을 다닐 당시의 시절을 살아보지 못했다. 타임머신이 있었다면 모를까, 우리는 그 시절 특유의 시대상을 각종 매체를 통해 짐작할 뿐 직접 체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시대에 대한 그리움 비슷한 것을 느끼는 일이 있다면, 그 이유는 과거의 그들도 현재의 우리와 같은 감정과 고민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과거 세대와 우리 세대의 시대정신이 다르고, 사용하는 물건들이 다르고, 기술의 발전에 따라 생활 방식도 달라졌다. 그런데 인간이 살면서 겪는 일들로 인해 촉발되는 다양한 감정들이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달라질까? 오히려 그 반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을 보낼 수 있다.
또 과거에 대한 막연한 동경일 수도 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은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최고가 아니라,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가 살아있는 시대가 황금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인공이 그 시대에서 만난 여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대보다 더 과거로 가면 행복할 것 같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이 순간보다 과거가 더 행복했노라 말한다. 자신이 경험했든 안 했든 간에, 그들은 ‘그래도 그때가 좋았었지.’라면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노르웨이의 숲이 독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는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