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고 쓰다.
솔직히 '설국'은 다 필요 없고 첫 문장만 읽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나오는 일본 소설 중에서 이것보다 더 임팩트 있는 스타트를 끊을 수 있는 작품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작가 개인의 불행한 가정사와 극도의 탐미주의는 결국 고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끝없이 내리는 눈, 우키요에, 온천, 터널을 지나면 창밖으로 보이는 눈 덮인 풍경들과 기차역, 하얗게 분을 칠한 게이샤들. 시마무라는 고마코와 정열을 나누지만, 요코에게도 눈길을 주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소설의 내용은 이게 전부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게 뭐지?'라는 심정이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기승전결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시마무라가 아내 모르게 온천으로 가서 불륜을 저지르는 내용이었다. 인물 간의 갈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물이나 사물에 대한 의미를 유추하는 요소도 볼 수 없었다. 결국 미사여구와 이미지의 승리인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소설의 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노벨상 시상식에서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소감을 말할 때 시를 읊었다고 한다. 우키요에, 하이쿠, 기모노의 이미지가 다시 떠올랐다.
어쩌면 시마무라가 소설 속에서 방문한 온천 마을은 일종의 판타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아내가 있지만, 여관에서 게이샤와 바람을 피운다. 아무런 의심 없이 순수하게 그만 바라보는 여자가 있고, 또 시마무라는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 허무를 느낀다. 여관 속 게이샤의 샤미센 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술에 취한다. 모든 것이 일장춘몽뿐인 것들에 시마무라는 안쓰러운 눈길을 보내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새 그 속에서 허우적댄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마무라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그는 고전무용에 대해서 글을 쓰지만, 사실 모든 것이 '서양의 인쇄물에 의지한' 탁상공론에 불과했다. 실제로 보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하는 그의 글은 동경심뿐이다. 때문의 그의 시선들은 모두 탐미적이다. 시마무라는 현실 속의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는 것일까. 일방적인 서정은 모두에게 허무를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가스를 들이마시고 자살했다고 한다. 박경리 선생의 유고 산문집인 '일본산고'에 나오는 도올 선생과의 대화집에서, 선생은 그 원인을 일본의 감상주의에서 찾는다.
스사노오노미코토(素淺鳴尊, 天照大神[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의 남동생)의 이야기가 말해 주듯이 일본의 역사는 처음부터 정벌과 죽임입니다. 사랑을 몰라요. 본질적으로는 야만스런 문화입니다. 그래서 문학작품에서도 일본인들은 사랑을 할 줄 몰라요. 맨 정사뿐입니다. 치정(癡情)뿐이지요. 그들은 본질적으로 야만스럽기 때문에 원리적 인식이 없어요. 이론적 인식이 지독하게 빈곤하지요. 그리고 사랑은 못하면서 사랑을 갈망만 하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디 문인(文人)의 자살을 찬양합디까? 걔들은 맨 자살을 찬양합니다. 아쿠타가와(茶川龍之介,1892~1927), 미시마(三島由紀夫,1925~1970), 카와바다(川端康成,1899~1972) 모두 자살해 죽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그들의 극한점인 로맨티시즘을 극복 못할 때는 죽는 겁니다. 센티멘털리즘의 선이 너무 가냘퍼서 출구가 없는 겁니다. (박경리, 일본산고 中)
이제 민족주의는 시대와 맞지 않는 사상이라는 의견이 다분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맞은 선생의 일갈은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기회를 던진다. 물론 적당히 걸러 들어야 할 점도 있지만, 오늘까지 이어져오는 '설국'에 대한 다양한 비판 속에서 위와 같은 인용문의 결을 따르는 사람이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국'은 '명확한 플롯이 없는 대단히 모호한 작품이지만, 감각적으로 뛰어난 문체와 우수 어린 묘사로 누구나 그 속에 빠져들게 할 만한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소설이다. 하지만 일본 특유의 아름다운 미적 감수성이라는 설명과는 반대로, 가스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의 문학 세계 속 설국은 퇴폐적인 유토피아였다. 비현실적인 소설 속 세계는 번지르르한 겨울의 눈빛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 정작 알맹이는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