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의 '잊기 좋은 이름'을 읽고 쓰다.
모두가 글을 쓸 수 있는 시대라고 하지만, 그들 모두를 작가라고 칭하기에는 아직까지 부족한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에 스스로를 비추어 봤을 때, 나는 아직 취미로 글을 끄적거리는 학생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 혹은 다른 방식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사람들 중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고전을 만든 이들은 자신만의 아이덴티티가 있고 주변 상황이나 여러 문제에 대한 이해를 끊임없이 시도하기 때문이다. 또 이런 유형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많은 적극적인 이들이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변화를 이끌어냈다.
한편, 독서는 많은 취미 중에서도 가장 사적인 취미다. 일단 주변이 시끄럽거나 번잡스러우면 책을 읽기 힘들다. 그래서 조용한 방 안이나 음악이 좋은 카페를 가서 책을 펴야 한다. 요즘은 독서 클럽이 많아서 다 같이 모여 읽는 것이 유행이라는데, 2년간 휴학 상태의 어엿한 아웃사이더인 내가 그런 모임을 열심히 나가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물론 독서를 한다는 일이, 더 자세히 들어가면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 작품을 굳이 찾아 읽는 일을 취미로 삼는 것이 사회성 하나 없고 조용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것이 취미예요,라고 말하면 왠지 그 사람은 굳이 광장에 나가 깃발을 들고 시위를 하는 타입은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여기서 갑자기 문학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저 멀리 유럽의 철학자들이나 할 것 같은 이 말들에 염증을 느낀다면 당신은 정상이다. 하지만 다시 첫 문단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만큼 무관심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내고, 또 그만큼의 사람들이 귀를 막고 있을까?
김애란 작가는 이번 산문에서 문학과 언어, 그리고 사회와 사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게 적어 내려갔다. 책 속의 여러 구절에서 나는 이 주제들에 대한 작가의 고민과 그에 대한 결론을 엿볼 수 있었다.
단순히 '꽃잎이 떨어진다'라고 생각하는 삶과 그렇게 떨어지는 꽃잎 때문에 '봄이 깎인다'라고 이해하는 삶은 다르다고. 문학은 우리에게 하나의 봄이 아닌 여러 개의 봄을 만들어주며 이 세계를 더 풍요롭게 감각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종이를 동그랗게 구기면 주름과 부피가 생기듯 허파꽈리처럼 나와 이 세계의 접촉면이 늘어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잊기 좋은 이름 中 '점, 선, 면, 겹')
아마 문학과 사회, 그리고 사람을 잇는 선을 그려야 한다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시작해야 할 것이다.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그저 단순한 킬링타임용 취미가 아닌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생의 군상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내가 잠시나마 그 사람이 되어보는 것. 이는 좁았던 내 시선을 더 넓은 세상으로 옮기고, 다양한 사회를 바라보는 시도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이해란 비슷한 크기의 경험과 감정을 포개는 게 아니라 치수 다른 옷을 입은 뒤 자기 몸의 크기를 다시 확인해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작가라 '이해'를 당위처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지만 나 역시 치수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불편하고, 그렇게 애쓰지 않으면 냉소와 실망 속에서 도리어 편안해질 인간이라는 것도 안다. 타인을 향한 상상력이란 게 포스트잇처럼 약한 접착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해도 우리가 그걸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잊기 좋은 이름 中 '점, 선, 면, 겹')
세상을 마주하고 살아가면서 어느 하나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많다. 당장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부터 완벽하게 파악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며 풍경이며 대화들을 어떻게 편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이해'라는 과정을 치수 다른 옷을 입는 것에 비유한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또 불편한 마음이 들면서도 오히려 편안해짐을 느낄 것이라는 작가의 솔직한 고백에 부끄러웠다. 왜냐하면 나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모습의 인생들 앞에서 어느 순간 나는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체념한 순간이 많았다. 백번 양보해야 비로소 이해가 가는 사람도 있었고, 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이런 일은 많은 양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기에 진절머리가 났던 것 같다.
그래도 우리가 그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내가 나로 살아가게 하는 말은 '당신'이 '당신'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과 같으며, 외로운 우리보다는 행복한 개인으로 살아가는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름'이라는 사실 하나로 얼마나 외로운 적이 많았던가. 소설 속에는 가상의 인물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그 안에서 작은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데, 언제나 사건이 일어난다. 서로를 오해하고 미워하며 외로워하다가 다시 이해하려 노력하고 사랑하는 그 모든 일들이 실상과 다를 바 없다. 문학의 역할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가상의 일들을 미루어 현실의 문제들을 다시 생각해보고, 이야기하고, 반성하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