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겠지만'을 읽고 쓰다.
세상이 모두 가식 덩어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 보면 열등감의 발로였고, 나도 가식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으니 할 말은 없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환멸로 그런 생각을 했었나 싶기도 하다. 서점을 가보면 항상 인기 있는 자기 계발서의 종류는 '성공하는 인간관계...' 같은 제목으로 시작하는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인생의 끝까지 따라오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였다.
나는 어디선가 사람의 인연은 마치 체에 모래알을 거르는 것과 같다는 비유를 들은 적이 있었다. 지나갈 사람들을 보내고, 가는 사람은 내가 피곤해지니 잡지 말고, 오는 사람 굳이 막지 말자. 결국 시간이 지나면 좋은 사람들만 곁에 남는다는 뜻이었다. 나는 내가 붙잡지 않으면 연락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애초에 연락은 먼저 해야 한다는 선제성의 법칙을 믿지만, 게으른 성격 탓 때문에 그 법칙을 자주 어길 때가 많았다. 내가 친해지고 싶은 경우도 있었고 또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든 카톡을 보내는 것은 어려운 것이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자명하다. 운다고 해서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내 눈은 항상 퉁퉁 불어있을 것이다. 정말 그것은 세상에서 최고로 가성비가 좋은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많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골치 아픈 사건들과 습관적인 불안들은 항상 벅차다.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은 누구보다 그런 대처에 성숙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현실적인 위로를 준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뭔가를 쓰고 싶어 하지만, 자칫하면 부담스럽고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어서 자제하는 경우가 많다. 세상 누구나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지만, 정작 그런 글을 찾아 읽다 보면 너무 많아서 이젠 뻔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서점과 SNS는 길어야 두 줄짜리 글로 사람들을 힐링해주는 책이 많이 있다. 나는 그런 책들이 싫다. 카페에 비치되어 있던 것을 한 번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덮고 나니 기억에 남는 말이 없었다. 오히려 속 빈 위로들은 시간만 아깝게 만든다는 생각만 났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것을 말해도 다르게 표현하는 글을 읽어야 한다. 사랑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보고 싶어서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본래 그 말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퇴색시키기 때문이다. 사는 걸 좀 덜 창피하게 해 주고 힘도 되는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그리운 날들은 무조건 있다. 나츠메 소세키는 사랑한다는 말을 '달이 참 예쁘다'라고 번역한 적이 있다. 이처럼 시인의 표현은 우리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인터넷에 기록하는 일상의 가식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이런 시인의 담백한 한 마디는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