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다가 들린다'를 보고 쓰다.
누구나 한 번쯤 모래사장에 가만히 앉아 밀려오는 파도들을 멍하니 바라본 적이 있을 것이다. 너울거리는 파도는 어딘지 모를 먼바다로부터 밀려와 해수욕장에서 하얗게 부서진다. 그렇게 모래사장에 부서지고 흩어져 버린 파도는 보이지 않는 힘이 바닷물의 너울거림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그 힘은 바닷가의 모래사장을 조금씩 갉아먹거나, 사람들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던져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모든 것을 깊은 바닷물 속으로 잠기게도 한다. 어쩔 수 없는 힘에 저항하지 못하는 우리는 다만 그 흐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런 파도의 성격은 어느 날 갑자기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것을 바꿔버린다는 점에 있어서 감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주변의 풍경이 핑크로 보이고, 우울과 절망감에 빠진 사람들은 회색빛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감정과 파도는 또 하나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바로 둘 다 어느 정도 가까이 오기 전까진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그것들이 아주 가까이 왔음을 눈치채고 대처하려 하지만, 결국 그들 속에 잠겨 허우적댄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가고 나서야, 사람들은 그게 얼마나 큰 파도였는지 뒤늦게나마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파도를 다시 경험해보고 싶어도 이미 흩어져 버린 파도를 주워 다시 너울거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높고 짙푸른 파도가 밀려오는 순간, 다른 모든 것은 신경 쓸 겨를이 없어진다.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오늘 소개할 영화 ‘바다가 들린다’의 주인공인 모리사키 타쿠도 그 사실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도쿄에서 이사 온 리카코, 그의 절친 유타카와 함께 셋은 같은 학교에서 마지막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하와이로 떠난 수학여행에서 그녀에게 돈을 빌려준 타쿠는, 나중에 공항에서 리카코가 사실은 도쿄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거금을 받아낸 것임을 알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타쿠는 그녀를 따라 도쿄로 간다. 아버지의 외도, 그리고 아버지가 애초부터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는 점을 알게 된 리카코는 절망한다. 그녀는 아버지가 타쿠에게 미안하다며 잡아준 호텔로 쳐들어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욕조에서 잠을 자게 된 그는 막무가내로 나오는 리카코를 보며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결국 학교로 돌아온 둘은 이상한 소문으로 인해 멀어지고, 처음부터 그녀를 좋아했었던 유타카와도 서먹해진 상태에서 각자 대학으로 흩어지게 된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후, 동창회에 참가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라쿠는 유타카와 함께 바다를 보며 화해한다. 이리저리 꼬여버린 감정의 선들을 두고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던 라쿠와 유타카, 그리고 리카코는 그 당시 그렇게라도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감정들을 스스로 돌아보며 성장했다. ‘역시 난, 좋아했던 거야. 그렇게 느껴졌다.’ 영화는 이 대사와 함께 마무리된다. 마침내 그 모든 파도가 지나간 후, 라쿠는 좀 더 넓은 시선으로 파도들이 밀려오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그 속에 있지만 들을 수 없었던 여린 목소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희미하지만 명확한 바다의 목소리를, 밀려오는 사랑의 감정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