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고 쓰다.
나는 패션에 대해 모른다. 애초에 어떤 분야에 대해서 잘 아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것도 대답하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패션에 대해서는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다. 혹자는 옷을 입는다는 행위가 자신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또 다른 언어라고도 한다.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패션은 좋은 수단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계절마다 유행하는 색깔이나 스타일이 있고, 때문에 사람들은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자신과 똑같은 플리스나 롱 패딩, 트렌치코트를 입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마치 프로토스의 칼라처럼, 사람들은 모두 맞추기라도 한 듯이 똑같은 옷을 입고 나오고, 서로 민망해한다. 이런 상황들을 볼 때 옷이 오히려 몰개성의 상징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언제나 패션은 무시할 수 없는 산업이다. 남들과 다르고자 하는 욕망은 언제나 존재해왔으니까. 자신의 지위나 권력을 나타내는데 옷은 큰 역할을 했다. 더 화려한 색깔과 옷감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는 일은 언제나 중요한 일이었다. 남들과 차별화되고자 하는 욕망은 자신도 모르게 나의 성격과 인간관계, 심지어 평판까지 변화시키고, 어느새 돌아보면 과거의 나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게 한다. 영화의 주인공 앤드리아도 마찬가지다.
저널리스트로 일하는 것이 꿈이었던 그녀는 1년간 패션 잡지 '런웨이'의 편집장 미란다의 비서로 일하게 된다. 하지만 애초부터 이쪽 일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 업계 최고의 보스에게 인정받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때부터 앤드리아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디자이너 나이젤의 도움으로 그녀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스타일도 달라지고 일에도 적응해나가며 앤드리아는 미란다의 신임을 받고 파리에도 가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저널리스트라는 꿈과 오랜 친구들과의 우정도 희미해져 갔다. 하루 종일 일을 하며 보내는 그녀에게 예전처럼 글을 쓸 여유는 없었다. 회사에서 점점 인정을 받고, 예전 비서 에밀리를 뛰어넘는 보스의 신임을 받는 상황에서 예전처럼 친구들과 즐기는 앤드리아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흥미로운 점은, 그녀가 회사에서 승승장구할수록, 변화가 눈에 띄게 일어날수록 그녀의 눈 화장은 점점 더 진해진다. 주변 친구들과 자신의 남자 친구는 앤드리아를 떠나가고, 그런 상황에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스스로 합리화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는 깨닫는다. 앤드리아는 미란다를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었고,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주변인들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패션계가 주목하는 파워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앤드리아는 그런 모습이 자신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녀는 미란다의 전화가 오는 것을 무시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다. 마지막에 회사를 나와 면접을 보러 가는 그녀의 눈 화장은 다시 옅어졌다.
사실 어느 것이 더 옳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란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포기하는 대신 남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커리어를 쌓는 것을 선택했다. 자신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정점을 찍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을지는 누구도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앤드리아는 자신의 꿈과 친구들을 선택했다. 미란다 밑에서 계속 일했다면 아마 에밀리를 밀어내고 승승장구했을 테지만, 그녀는 그것보다 저널리스트라는 꿈과 자기 편인 사람들을 더 우선순위로 두었다.
선택에는 책임감이 따른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성공을 붙잡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또 그런 선택을 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미란다는 일을 선택했고 결국 성공을 거두었지만,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포기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악마가 아니었지만 프라다를 입기 위해서는 스스로 악마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선택에는 책임이 뒤따르고, 한 번 선택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미란다는 이 사실을 잘 알았다.
여담으로 영화에서 미란다 역을 맡은 배우는 메릴 스트립이다. 영화가 발표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이 사랑을 받는 이유는 그녀의 연기가 아닐까 싶다. 앤드리아와 미란다가 출장을 가서 둘이 마주 앉아있는 장면에서, 미란다는 앤드리아에게 자신의 상황을 말한다. 여기서 소름이 돋는 것은 미란다가 잠시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상태가 되더라도 곧 이성을 되찾는 장면이다.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는 미란다라는 역할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장면이어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연기를 앞으로도 오랫동안 볼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