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개인주의자 되는 방법

문유석 작가의 '개인주의자 선언' 읽고 쓰다.

by ABB

문유석 판사의 에세이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었다. 예전에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원작자이기도 한 작가는 평소에 페이스북 같은 SNS나 기타 다양한 매체에서 글을 써오신 분이었다. 내가 도서관에서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책인 ‘공산당 선언’이었다.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이라곤 족쇄뿐, 얻을 것은 전 세계’라는 유명한 어록처럼 개인주의가 잃을 것이라고는 스트레스뿐, 얻을 것은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라는 패러디가 책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해보았으나 아쉽게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에세이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가 말하는 합리적 개인주의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 아닐까.



난 이 책을 읽으면서 개인주의라는 말에 대해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지, 혹시 편견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스스로 반문해 보았다. 개인주의라는 단어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이미지는 ‘아웃사이더’였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줄이는 대신 나의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하며, 어떤 집단 내에서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개인주의에 대한 이미지가 큰 편견이었음을 깨달았다.


본 에세이와 신문에서 작가가 쓴 칼럼을 읽으며 그가 설명하고자 하는 합리적 개인주의는 집단의 목표와 독립적으로, 나와 상대방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특징임을 알 수 있었다. 사회는 규칙이 필요하며 이는 개인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는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해결하며, 그 과정에서 우리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 타인들과 타협하며 그들과 연대가 필요하다는 점은 자명하다. 개인주의는 이러한 시스템에서 사회 구성원이 어떻게 하면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알려준다.



물론 사람이 살아가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중요하다. 또 민주 사회에서는 누구나 다양한 의견을 제시할 자유가 존재한다. 문제점이 생기는 포인트는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여러 의견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개인은 은연중에 자신이 제시하는 의견이나 제안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는 문제 해결을 위한 타인의 의견을 묵살하거나 비난하는 원인이 된다. 그들이 가진 각자의 배경이나 처한 상황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해야 하지만, 이러한 조건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어차피 힘든 일이라며 이해하려는 태도조차 보이지 않는 사람들 역시 존재한다.


나는 이런 문제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서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기주의는 간단히 말해 자신의 이익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기주의자는 스스로를 위해 타인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것을 정당화한다. 이기주의가 나를 위한다는 말은, 정말 나 자신만을 생각한다는 뜻이지만, 이와 반대로 개인주의자는 집단의 개인들 각각을 위한다는 말로 설명하면 의미가 통할까. 이기주의자와 비교해서 보는 개인주의자는 결국 스스로에게도, 그 사람이 속한 집단에게도 더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실제로 의미 있는 변화를 도출하는 것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 과격한 목소리들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반대 의견을 가진 집단의 반발과 결속만 강하게 만들어 의견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뿐이다. 한 진영 내부에 생기는 작은 균열에서 변화의 지점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균열을 만드는 것은 같은 진영 내의 온건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작고 부드러운 '다른' 목소리들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고 보장할 수가 있을까? 기술이 발전하고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발달한 오늘날, 우리는 선행하는 세대의 경험이 유효하지 않은 경우를 점점 더 많이 체감하고 있다. 더 많이 일할수록 더 많은 성과를 이룰 수 있다는 과거의 기업 문화와는 다르게, 다양한 기업들이 개인의 생활을 존중하는 방향의 문화를 확립시키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실리콘밸리가 그랬고, 한국의 스타트업들도 미약하게나마 이런 생각을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심지어 당장 뉴스 기사만 살펴보아도 정반대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수직적 관계에 따른 갑질과 그에 따른 을의 피해들은 이제 질릴 정도로 접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있었던 아동센터의 사회복지사가 떠올랐다. 그분은 일하는 시간 외에도 센터장이 운영하는 교회에 나가야 했으며, 주말마다 복지 관련 회의라는 명목의 센터장 자기 자랑 시간에 참석하기 위해 어린 아들을 부모님께 맡겨 두고 일터로 나가야만 했다. 복지사가 원래 하는 일은 아이들을 관리하는 일이었지만, 식사 준비나 회계업무, 심지어는 다른 기관이 보수 공사를 할 때에도 나가야만 했다. 그분은 아동센터에서 경력을 쌓아서 다른 곳으로 넘어간다고 하셨지만, 결국 오래 계시지 못하고 사표를 던지셨다. 그분이 나가시면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여기가 특히 심하긴 하지만, 다른 센터들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다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계실 것이라고 말이다.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한자리를 꿰차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예전 세대인데, 그들 중 몇몇은 우리가 남이냐며 어깨동무를 걸어오지만 그 손길을 밀쳐낼 힘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과격한 목소리들이 문제를 알린다는 점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것들과 똑같이 중요한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들은 아직도 들리지 않는다. 변화의 균열을 만들기 위한 작은 목소리는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있는 합리적인 사람들에게 들리겠지만, 여전히 세상은 시끄러운 목소리들과 조용히 숨죽여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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