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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관 Feb 24. 2020

표현의 자유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영화 '래리 플린트'를 보고 쓰다


표현의 자유는 수많은 사람들의 논쟁을 이끌어냈다. 민주 사회의 시민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쓰고 싶은 것을 쓰는 표현의 자유는 매우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필요 이상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그것은 타인의 존엄과 자유를 뺏게 되므로 어느 정도의 제한을 둬야 한다는 의견도 없지 않다. 오늘의 주인공 래리 플린트는 그 격렬한 논쟁 한가운데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일생을 담은 영화 '래리 플린트'는 성인 잡지 '허슬러'를 발행한 래리 플린트의 일대기와, 폴웰 목사와의 법정싸움을 다룬다.



그는 스트립 바를 운영하며 살다가, 우연히 성인 잡지를 보고 자신도 이런 것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허슬러' 잡지를 만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모델의 과도한 노출, 도를 넘는 극단적인 풍자글로 인해 법정에 수시로 불려 나가고 보석으로 풀려나길 반복한다. 그런 그의 법정 싸움과는 달리 잡지는 엄청나게 팔려나가고, 그와 잡지사는 승승장구한다.



그러던 도중, 잡지에 실은 하나의 광고 때문에 그는 미국을 들썩이게 만든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는 평소에도 잡지에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를 까는 내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래리 플린트는 기어이 유명 목사였던 제리 폴웰이 근친상간을 즐긴다는 경악스러운 광고를 내기에 이른다. 당연히 목사는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했고, 이 사건은 연방 대법원까지 가게 된다.



그런데 연방 대법원은 래리 플린트의 손을 들어준다. 공적인 인물이나 정책을 비판할 수 있고, 그런 일은 악의에서 시작된 것이라도 허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다른 사건에서 이번 사건이 계기가 되어 어떤 비판에 대한 불이익이 주어진다면 공적인 문제에 대한 비판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을까? 절대 아닐 것이다. 또 표현 자체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인 것이며, 애초에 광고가 사실이 아니라는 점도 이 놀라운 판결에 한몫을 했다. 결국 대법원의 판사는 공인의 정신적 피해보다 표현의 자유를 더 높이 쳐줬다.



“수정 헌법 제1조가 저 같은 쓰레기의 자유를 보장한다면 모든 사람의 자유 또한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전 최악이니까요.”

- 래리 플린트 中 -



래리 플린트의 인생은 개인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주장 중에서는 납득이 가는 것도 있다. 바로 위와 같은 대사다. 그가 최종적으로 법정에서 패배한다면, 이후에 일어날 언론사의 표현의 자유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신문에서 어떤 인물을 비판한다면 나중에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고 피해 보상을 물어줘야 하거나, 편집자가 감옥에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대법원의 결정은 합당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허슬러의 그러한 광고로 인해 공인이 모욕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종교인에 앞서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훼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악플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많다. 수많은 배우와 가수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팬들은 인터넷에서 익명성에 몸을 감춘 채 악플을 날리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들이 사랑하던 스타들을 잃고, 스타들의 친구들과 가족들은 커다란 슬픔을 안고 살아가야만 했다. 유튜버들은 하나의 악플 때문에 우울증을 겪는다고 말하기도 하고, 극단적인 경우까지 생기기도 했다. 표현의 자유가 과연 민주 사회의 시민의 특권으로서 계속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이제는 법이 개입해야 할 차례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일까?



이 문제는 민주주의가 계속 존속되는 한, 끊임없이 입방아에 오르는 문제일 것이다. 언론의 자유가 훼손되어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생겼던 일도 사실이고, 연예인들이 인터넷상에서 올라오는 악플로 인해 고통받는 현실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래리 플린트와 폴웰 목사의 법정 공방은 1988년에 일어난 일이다. 아이러니한 일은 사건이 종결된 후 시간이 지나서, 두 사람은 친구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친구가 되었다고 해서 지금도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이런 일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좀 더 심도 있는 해결책을 만들어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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