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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관 Mar 15. 2020

흰쌀 죽 같은 애니메이션

영화 '이웃집 토토로'를 보고 쓰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클래식이라고 인정받는 작품인 '이웃집 토토로'를 나는 이번에 처음 봤다. 그래서 친구들이 도대체 그동안 뭐 했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 다만 넷플릭스에서 보여주는 '하우스 오브 카드'하고 '나르코스'하고 '지정 생존자' 정주행 했다고 말할 것이다. 사실 그쪽이 조금 더 내 취향이긴 하다. 근래에 지브리 애니메이션 리뷰를 많이 하긴 했지만, 나는 원래 정치 극하고 마약 나오는 드라마가 훨씬 더 재밌다. 배신, 음모, 정치질, 로비, 의리가 판치는 시리즈물은 이유를 불문하고 언제나 환영이다.



나는 단언컨대 이런 취향의 사람들이 생각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당장 넷플릭스 순위권만 봐도 '나르코스'가 상위권에 위치하고 있고, '지정 생존자' 시리즈는 한국에서 한국 버전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상황이 극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한 드라마는 언제나 자극적이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다. 그래서 일단 한 번 보기만 하면 그 분야의 드라마나 영화만 보게 되는 것이다. 자극적인 음식을 먹은 사람들이 순한 미음이나 죽은 일체 먹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자극적인 음식을 계속 먹다 보면 탈이 나기 일쑤다. 당장 나만 해도 이번 주에 위하고 대장 내시경을 받았다. 원래 40대 이상의 중년층이 건강검진에서 처음 받게 되는 내시경을 나는 20대 초반에 벌써 두 번이나 했다. 위내시경은 고3 때 한 번 해봤고 대장 내시경은 이번에 처음이었는데, 정말 다신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저녁 7시에 약을 담은 포카리 맛나는 물을 한 통 다 비우고 화장실을 20번 정도 가는데, 그 짓을 그다음 날 새벽 5시에 일어나서 한 번 더 해야 한다. 그렇게 개고생을 해서 얻은 결과는 과민성 대장 증후군과 역류성 식도염이라는 진단서 하나였다.



이런 비극적인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순한 음식을 평소에 잘 먹어두어야 한다. 그래야 탈이 나지 않는다. '이웃집 토토로'는 그런 영화다. 이 영화는 처음 만들어진 이후 지상파에 방영될 때마다 시청률 10%는 기본으로 넘는 공전의 대-히트를 쳤다.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예능, 도를 넘는 극우 방송과 정치 뉴스와 19금 채널로 지친 일본 국민들에게 어쩌면 이 영화는 미음과 흰쌀 죽 같은 무자극 푸드의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아픈 엄마의 병원과 가까운 시골 마을로 이사 온 아빠와 아이들, 그리고 시골 숲의 신이 나와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다.



동심에서 비롯된 판타지, 그리고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느긋한 토토로 신의 모습을 보면 어느새 내 마음도 편안해진다. 그 시골에서는 숲을 노리는 나쁜 사람들도 없고, 사람들을 공격하는 늙은 멧돼지도 없다. 몸을 썩게 만드는 이상한 재앙의 저주도 없고, 있는 것은 그저 귀여운 먼지벌레뿐이다. 하지만 이미 자극적인 세상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영화의 두 아이들이 토토로와 함께 엄마를 찾으러 버스를 타고 날아다니는 그 시점에서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다. 동심을 동심으로 볼 줄 모르는 그들의 잘못인가 생각해봤지만, 해석은 다양하게 주장할 수 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넘기기로 했다.



한편 이웃집 토토로에서는 본격적으로 지브리가 자연을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 알 수 있다는 작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브리의 자연은 배경이 아닌 주인공 중 하나로서 영화의 주제의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바람계곡 나우시카와 모노노케 히메, 천공의 성 라퓨타, 마루 밑 아리에티 같은 작품에서의 자연은 인물과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공존해나가는지 보여주며, 동시에 인간은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브리의 대답을 보여주기도 한다. 친근한 자연, 생존의 경쟁자로서의 자연, 인간 생활의 배경으로서의 자연과 거기서 파생되는 고민들은 언제나 지브리 시리즈의 시작과 끝이었고, 토토로 역시 그 점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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