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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관 Mar 18. 2020

상대방을 위한 배려가 중요한 이유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를 보고 쓰다.

그동안 써왔던 지브리 시리즈의 끝이 보인다. 이번 넷플릭스와 지브리의 합작으로 올라온 많은 작품들을 본 일은, 나로 하여금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의 다른 감독들의 작품세계를 조금이나마 공부할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예전 친구들과 같이 봤던 오래된 애니메이션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어서 즐겁기도 했다. '마루 밑 아리에티'(이하 아리에티)는 그동안 내가 소개했던 작품들 중에서 비교적 최근에 나온 작품이다. 그래 봤자 10년이나 된 작품이긴 하지만, 오래전에 나온 '이웃집 토토로'와 비교해봤을 때 훨씬 그림의 선이 깔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지브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더욱 명확하게 다가왔다.



아리에티는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한국 영화 대 성공의 기준은 천만 관객을 영화관으로 불러 들었느냐가 관건이듯이, 일본에서는 '흥행 수익이 100억 엔을 넘냐, 그렇지 않으냐'로 따진다고 한다. 1년에 우리나라에서 천만 관객이 찾는 영화가 나오는 것이 흔하지 않은 일이듯이, 일본도 100억 엔이 넘는 흥행 수익을 벌어들이는 영화가 나오는 것은 그 해 일본 영화계의 사건이기도 하다. 아리에티는 결과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1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낸 작품 중, '모노노케 히메' 다음으로 9위를 기록하며 지브리 파워를 입증했다.





아리에티는 이 영화에서 나오는 소인 여자아이의 이름이다. 소인족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의 집 깊숙한 지하에 집을 마련하고 인간의 물건을 '빌리며' 살아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둑질이 더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아리에티의 가족들은 그동안 숲 속의 오래된 저택 어딘가에서 집을 짓고 살아왔지만, 어느 날 심장병을 앓고 있던 쇼우라는 남자의 이사로 인해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쇼우는 아리에티네 가족이 집에서 필요한 물품을 가져간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전날 떨어트렸던 설탕 조각을 가져다주고, 인형의 방에 있던 주방 기구들을 그대로 집에 가져다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은 결국 자신을 돌봐주던 하루 아줌마가 아리에티의 어머니를 잡아 병에 가두고, 가족들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



결국 아리에티는 떠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쇼우와 아리에티가 마지막까지 마음을 나누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쇼우는 자신의 행동이 미숙했음을 깨닫고 그녀를 돕기 위해 노력한다. 병에 갇힌 어머니를 구출하고, 하루 아줌마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집의 위치를 바꾸기도 한다. 그는 마지막까지 그녀가 떠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녀가 주전자 배를 타고 떠나기 전, 둘은 서로 마지막 인사를 한다. 쇼우는 각설탕을, 아리에티는 자신의 머리를 묶어두는 나무집게를 선물하며 작별을 고했다. 나는 쇼우와 아리에티 가족이 서로 공존하길 바라며 영화를 봤지만, 결국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감독은 왜 서로의 공존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인간은 공포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쇼우의 등장 장면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감정은, 어두운 밤에 아리에티와 그녀의 아버지가 필요한 물건을 가지러 갈 때로 이어진다. 이 장면에서 인간의 공간은 어둡고 미지의 위험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또 하루 아줌마가 아리에티의 어머니를 잡아 병에 가두고 흥얼거리는 모습은 섬뜩함 그 자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나는 인간인데, 어느새 소인의 입장에서 인간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만약 소인이라면 친척들과 조상들이 모두 인간을 마주해서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었는데도, 어느 날 나타난 호의적인 인간 한 명이 나타났다고 해서 같이 살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또 영화에서 소인과 마주친 인간 중 가장 호의를 보이는 쇼우조차 심장병으로 죽어가던 상태였다. 수술을 받으면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 희박한 가능성에 마지막 소인들일지도 모를 자신의 가족을 내맡긴다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디즈니 영화의 결말처럼 해피엔딩을 기대한다. 결국 인간과 소인은 화해하고 오랫동안 같은 집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결말을 우리는 뻔하다고 말하면서도 은연중에 기대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수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아리에티 가족은 떠난다. 또 쇼우의 수술은 성공적이었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점은 쇼우와 아리에티의 관계가 변하는 과정이었다. 둘의 첫 만남은 각설탕으로 시작해서 각설탕으로 끝난다. 하지만 이 각설탕은 각자 다른 의미로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첫 번째 각설탕은 '경솔함'이다. 그저 자신의 호기심 때문에 상대방이 난처할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다가간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은 아리에티를 위기로 내몬다. 하지만 두 번째 각설탕은 다르다. 그것은 바로 '화해'를 담고 있다. 하루 아줌마와 맞서 서로 교감하고 위기를 무사히 넘긴 뒤 건넨 그 각설탕에는 쇼우의 화해와 진심을 담고 있다. 그래서 아리에티는 첫 번째와는 달리 두 번째에 그 각설탕을 받는다. 그러면서 그녀 역시 '빌리는' 것이 아닌, 선물을 줄 수 있는 관계를 만들게 되었다.





영화는 종족을 넘어선 아름다운 공존이라는 결말을 주지 않았다. 다만, 결과가 뻔히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그다음을 도모하게 하는 희망과 용기를 줬다. 인간이 소인을 위해 만들었던 인형의 집은 아름다웠지만 정교한 가짜였고, 이런 사실은 영화를 보는 내내 품었던 내 기대와 닮아있었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기대와 낙관은 언제나 몰이해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나는 초조해하지 않은 채 두 사람의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을 응원했을 것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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